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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의 고통 퍼온 글

긴 긴 시간 2012. 10. 10. 04:47

애도를 제때 하지 못한 이들의 비극

시사INLive | 장정일 | 입력 2012.06.23 11:03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의 문학적 표현이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한다던 한용운의 시구이다. 인간의 삶은 숱한 종류의 만남으로 채워져 있지만, 인연의 고리는 필연적으로 끊기게 되어 있다. 그 어떤 관계도 죽음이 떼어놓는 절대적 이별을 피할 수 없다.

자크 라캉은 죽음을 두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단계는 생물학적인 죽음이고, 두 번째는 매장·사망신고·제사와 같은 의례를 통해 죽은 자를 산 자들의 세계와 분리하는 단계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요절한 어느 젊은 시인의 유고 시집에 해설을 쓰면서, 죽음의 마지막 단계를 하나 더 늘렸다. 죽음은 한 인간의 육체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이 산 자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동안에는 그 육체마저도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말장난 같지만, 산 자의 기억에 살아 있는 망자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다. 그러므로 죽음의 최후 단계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그리하여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이다. 그때서야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지영 그림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사람이 일상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잊어야 한다. 죽음의 두 번째 단계라고 설명된 각종 의례는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산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원 없이 잊도록 해주는 과정이며, 산 자를 일상에 복귀시키기 위한 문화적·사회적 절차다. 정신분석 의사나 심리학자들은 이런 일을 애도(哀悼)작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죽은 자는 죽고, 산 자는 살아야' 하는 성공한 애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애도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망자에 대한 기억을 붙든 채, 한용운의 시구처럼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상황 속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실패한 애도가 우울증으로


성공한 애도와 실패한 애도에 일찍부터 관심을 기울인 사람은 정신분석을 창시했던 프로이트다. 그는 1917년에 발표한 < 애도와 우울증 > 이라는 논문에서, 애도작업의 요체는 산 자가 떠나보낸 자에 대한 감정적 애착을 단절하는 일이라고 밝힌다. 비정하지만, 그것이 성공해야만 산 자는 죽은 이에게 쏟았던 리비도(생의 에너지)를 회수해 다른 대상에 재투자할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애도작업을 거부하거나 외부의 방해로 애도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 산 자는 죽은 이에 대한 죄책감을 껴안고 자신을 공격하게 된다. 사랑하던 대상은 상실되고 없는데도 차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상실된 대상에 대한 적절한 의미화(기념·인정)가 사회로부터 부정되었을 때, 그는 자살이나 자기비하 내지 나르시시즘의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그것이 우울증이다.

왕은철의 < 애도 예찬 > (현대문학 펴냄, 2012년)은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에 기대어 문학 작품을 감상하고 분석한다. 지은이는 현대 영문학 전공자이지만 시대와 언어권에 구애됨이 없이 꽤 광범위한 작품과 실존 인물의 삶을 대상으로,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아슬아슬한 경계와 둘 사이의 긴장이 빚어낸 창조력의 비밀을 캔다. 특히 아버지가 사망했던 때 제대로 애도를 하지 못했던 탓에 평생 부채의식에 짓눌려 살았던 실비아 플라스와, 그녀가 자살하고 난 뒤에 외부인에게 애도의 권리를 빼앗겼던 테드 휴즈의 사례는 두 부부 시인의 작품 세계마저 깊이 이해하게 해준다. 하지만 여기서는 셰익스피어의 < 햄릿 > 을 소개한다.





< 애도 예찬 > 왕은철 지음현대문학 펴냄

부모상(喪)을 3년으로 못 박았던 공자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도 기간을 1~2년 정도로 설정했던 프로이트는 모두 애도작업에 일정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보았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보면, 햄릿의 우울증과 광증은 단축된 애도가 일차적 원인이다. "장례식 때 쓴 고기가 식은 채로 결혼식 잔칫상에 놓였다"라는 햄릿의 저주처럼, 그의 어머니는 남편의 장례식을 마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시동생과 결혼했다. 햄릿에게는 부친의 죽음을 기릴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데다가, 어머니와 숙부는 슬픔에 빠진 햄릿을 조롱하며 어서 새아버지를 섬기라고 닦달한다. 중단된 애도는 햄릿의 마음속에 복수를 채근하는 아버지의 유령을 키우게 된다. 지은이는 햄릿이 숙부에 대한 복수를 자꾸 미루는 것은 그의 결단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복수와 함께 사랑하는 아버지에 대한 애도도 막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햄릿은 복수를 연기함으로써 아버지를 계속 살아 있게 하고 싶었으며, 아버지를 다른 대상으로 교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애도할 권리를 빼앗는 국가

지은이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상당히 수용하면서도, 애도에 관한 정신분석이론은 인간의 이기적인 생존본능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대신 지은이는 오히려 애도의 '성공은 실패한 것'이고 '실패는 성공한 것'이라는 자크 데리다의 논의를 빌려, "부재하는 자가 부재한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애도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애도일 수 있다"라는 역설을 예찬한다. 진정한 애도란 프로이트가 처방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지우는 게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문학은 거의 무한정한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대상)의 죽음이나 그것의 부재 또는 그것과의 이별을 다룬다. < 애도 예찬 > 이 훌륭하게 입증해주었듯이 문학은 애도에 성공하거나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또한 애도 경험은 셰익스피어가 아버지의 죽음 직후에 < 햄릿 > 을 썼다는 설과, 앞서 본 실비아 플라스와 테드 휴즈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작가들의 창조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애도는 결코 문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소포클레스의 < 안티고네 > 는 애도가 작가의 글감이나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동의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티고네가 전사한 오빠(폴리네이케스)를 땅에 묻어주려고 했을 때, 그것을 가로막은 것은 국가(크레온)였다. 우리나라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허다한 의문사와 열사를 양산했고, 그때마다 국가는 주검을 탈취하고, 영정을 짓밟으며, 가족과 친구들이 애도할 권리를 빼앗았다. 참 묘하게도 < 햄릿 > 과 < 안티고네 > 는, 원천 차단당한 애도와 의미가 박탈된 주검에 의해 국가가 멸망하는 공통점이 있다.

장정일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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