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화, 커리큘럼, 또 하나의 통제
지금은 그런 말을 별로 쓰지 않지만 예전에 ‘의식화’ 하면 상당히 불온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쓰였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에 따르면, 이미 민중들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의식화하면서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에서 행해졌다는 의식화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의식화를 넘어서는 재의식화의 과정이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은행저축식 교육에서 문제제기식 교육으로 이행할 것을 주장했다.
한때 대학은 무비판적으로 찌든 지배 이데올로기를 세척하면서 비판의식을 키우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장이었다. 그래서 학점이 선동열 방어률인 걸 농담 반 진담 반 자랑스러워하던 청춘들이다. 대략 12년간의 숨막히는 제도교육이 ‘이건 참 불온한 거야’라고 가르쳐주었던 많은 것을 다시 보아야 했다. 우리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려고 했다. 하지만 신입생 때 선배들과 같이하던 세미나도 문제는 많았다. 일단 자신들도 충분히 공부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얕은 지식을 주입시키려 했다. 이래저래 세미나 하다가 선배들과 가끔 싸우기도 했다.
나중에 그리 열심히 보았던 변유(변증법적 유물론), 사유(사적 유물론) 관련 서적이 소비에트 고등학교 철학교과서를 베낀 것으로 그것조차 관변용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선배들은 정파적 입장에 따라 커리큘럼을 통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소작농 아직도 있거든. 그러니까 한국 사회는 식민지반(半)자본주의 사회야”라며 이야기하던 선배들에게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금칙어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
|
|
▲ ‘청춘의 커리큘럼’, 이계삼, 한티재, 2013 | 이계삼 선생의 이 책 <청춘의 커리큘럼>을 읽다가 예전 생각이 이처럼 거칠게 떠올랐다. 많은 문제가 있었지만 그때 그렇게 공부했던 것도 일정한 의미는 있다. 단 우리는 그것을 넘어 우리가 발붙이는 이 사회와 세상의 시대 징표를 더욱 선명하게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 열심히 공부했던 사회과학 세미나도 그걸 주도했던 이들이 그토록 비판했던 ‘관념적 말잔치’에 그쳤던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이계삼 선생은 교직을 그만두고 밀양 송전탑 싸움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예전에 그의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을 읽고 전율을 느꼈던 적이 있다. 나는 그의 글에서 예언자적 통찰을 엿본다. 성서의 구약에서 예언자는 지성인의 전형으로서(지배권력에 영혼을 팔아버린 기능주의적 어용 지식인이 아닌) 지배권력에 저항하고, 수많은 기득권 세력을 불편하게 하는 직설을 가감없이 날렸다.
이계삼 선생은 ‘파국을 눈앞에 둔 아니 어쩌면 이미 파국에 깊이 빠져 있는 시대를 어떻게 응시하고 살아갈 것인가’, ‘우리를 현혹하고 눈멀게 하면서 신처럼 군림하는 작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직시하자’는 통찰을 큰 줄기로 여러 현대의 예언자들의 삶을 자신의 커리큘럼으로 끌어온다.
지금은 생태주의 잡지의 제목이 된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슈마허를 통해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삶의 변화이고, 우리들의 삶의 조건에 대한 작지만 구체적인 변화이며, 이를 가능케 할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16쪽)이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또 슈마허가 쓴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를 통해 그가 참 그리스도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가 버마에 있을 때의 에피소드도 인상적이다. 버마 사람들은 아주 저렴한 가격의 마차를 이용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렇게 야박한 대우를 받는 말 뒤에 앉아 염치없이 다니느니 차라리 걷겠어요.”(27쪽)
웬델 베리라는 미국의 농부이자 사상가를 통해 소농이 민주주의의 기반이며, 우리에게 산적한 문제를 풀어가는 데 그 답이 농업과 농민에 있음을 적시한다. “오늘날 일반적 통념이란 경제성장을 통하여 중산층이 두터워질 때 민주주의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웬델 베리는 단호하다. 소농이 민주주의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중산층은 우리가 지금 지켜보고 있듯이 세계 경제의 추이에 따라 끊임없이 등락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 서서히 옅어지고 몰락하도록 구조화된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 부와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된다. 땅과 자본이 소수에 집중되면 민주주의는 다만 정부의 형태에 불과하다는 베리의 진단은 정확하다. 지금 20대 80을 넘어 1대 99의 사회가 되어버린 오늘의 세계가 이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50쪽)
그러면서 저자는 마르크시즘을 학습하면서(물론 저자가 그 교재의 대부분이 소련과 동독의 어용학자들이 쓴 관제 교과서였다는 점을 밝히지만) 제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농민 계층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폄하였다고 한다. “농민들은 언제나 생산수단을 가진 소부르주아였고, 기회주의적인 중간자였다.”(65쪽) 이계삼 선생은 자그마한 귀농학교를 준비하면서 지금은 소박하고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거대한 물결이 될 실험을 하고 있다.
|
|
|
▲ “이계삼 선생은 교직을 그만두고 밀양 송전탑 싸움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그는 ‘파국을 눈앞에 둔 아니 어쩌면 이미 파국에 깊이 빠져 있는 시대를 어떻게 응시하고 살아갈 것인가’, ‘우리를 현혹하고 눈멀게 하면서 신처럼 군림하는 작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직시하자’는 통찰을 큰 줄기로 여러 현대의 예언자들의 삶을 자신의 커리큘럼으로 끌어온다.” 사진은 지난 3일 인천교구 월례 수요미사 ‘사람’에 강사로 초대돼 밀양 송전탑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계삼 씨 ⓒ정현진 기자 |
저자는 이외에도 더글러스 러미스, 조너선 코졸, 다카기 진자부로, 하워드 진, 도로시 데이 등을 불러내 우리의 길 안내자로 초대한다. 이런 길 안내자들의 삶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꽤 중요한 커리큘럼이 구성되어가는 걸 잘 알 수 있다. 그중 도로시 데이가 한 말은 예수가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친 말을 연상시킨다. 저자가 도로시 데이를 이야기할 때엔 ‘영성과 혁명’의 어우러짐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힘 있는 사람들 편에 서고, 약자는 망각하는 교회를 볼 때면, 예수님께서 모욕당하고 있고 사형에 처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고위 성직자와 관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회의 모든 백성, 특히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 아이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가 돌봐주고 싶어 하실 사람들의 것입니다. 창피합니다. 종교를 사회적 장신구로 활용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보면 구역질이 납니다. 교회는 기도를 필요로 하는 무시무시한 죄인입니다.”(299~300쪽)
이 시대를 밝히는 커리큘럼은 ‘농업의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또한 사라져가는 ‘석유의 시대’와 이미 괴물이지만 언젠가 그 얼굴을 드러낼지 모르는 ‘핵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제임스 하워드 쿤슬러의 <장기 비상시대>를 통해 석유에 지탱한 우리들의 불안한 삶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우리의 밤을 밝혀주던 이 휘황한 불들은 곧 꺼질 것이다. 그러나 결핍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모일 수 있을 것이며,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 것이며 스스로와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147쪽)
“석유에 중독된 삶, 소비와 안락 속에서 내팽개쳐진 인간의 품위, 만연했던 우울증과 비만, 일탈과 폭력, 석유 이후의 세계에서 전쟁과 추락의 격랑이 기다릴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이 거대한 전환의 시대는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할 기회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부디, 이 모든 일이 너무 늦지 않기를.”(147~148쪽)
핵발전은 석유문명의 사생아처럼 보인다. 이계삼 선생에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깊은 상처다. 그가 전해주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인간 드라마는 읽으면서 너무도 힘겨워진다.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특히 이미 피폭되어 죽음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을 얻어맞고도 핵발전소를 지탱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체르노빌은 저 먼 나라 이야기고, 후쿠시마는 저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인가? 저자는 미친 짓이나 진배없는 핵발전소의 풍경을 통해 우리에게 충분히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여기서 모두가 눈멀었을 때(무지도 죄다. 더 나쁜 놈은 눈 먼 척하는 인간들이다) 눈떠 있다가 왕따 당한 다카기 진자부로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는 시민과학자로서 온갖 수모를 당해가면서 핵발전소의 실상을 고발했는데, 이런 말을 남긴다. “뒤에 남는 사람들이 역사를 꿰뚫어보는 투철한 지혜와 대담하게 현실에 맞서는 활발한 행동력을 가지고 일각이라도 빨리 원자력시대에 종지부를 찍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여러분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274쪽)
아프니까 공부하자 멘토의 빛깔 좋은 말만 들여다보면 껍질만 남아
이 땅의 청년들은 참 많이 아프다. 가끔 너무 생각 없는 것 아니냐고 갈구기도 하지만, 그들의 속내를 들어보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헛될지라도 크게 꿈꿀 마음의 여유도 없고, 생활도 너무 힘들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이들을 향한 온갖 위안의 소리가 상품화되고 잠시 동안 마취제 역할을 하는 듯하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은 다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라 자기 하나 잘 버텨낸다고 능사가 아니다. 모든 게 어이없고 절망스럽게 구조화되어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는 공부가 필요하다. 세상이 힘들다고 말랑말랑한 말에 현혹되어 잠시 잊거나 도피하지 말고 일단 세상을 온전히 직시하는 공부가. 그런 공부를 혼자 하면 재미없고 쓸쓸하고, 또 다른 지적 허세로 변질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왕 하는 공부, 여럿이 같이 하자. 사실 청년들만 이런 공부가 필요한 게 아니다. 이 지구별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과 무관하지 않은 우리 모두에게 공부가 필요하다.
이제 아프니까 공부하자. 우리 자신의 삶을 지켜내고 잘 살아가기 위해 공부하자. 같이 하자. 세상에는 좋은 책 그리고 그 좋은 책을 연결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를 이끌어주는 좋은 길 안내자들이 많다. 이계삼 선생도 그중 하나다.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하고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쳤던 저자는 결국 교단을 떠났다. 이 책의 마지막 장 ‘나는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가’에서 자신에게 다가왔던 절망감도 토로한다. 하지만 그는 자본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수준의 조립품을 양산하는 좁디좁은 학교를 떠나 더 넓은 학교로 옮겨갔다. 짙은 절망 속에서 핵보다 더 강한 희망을 길어내는, ‘관념과 허위의 제국’을 넘어서 ‘진솔하고 구체적인 삶의 공화국’으로 이행하는 그의 커리큘럼은 더욱 업그레이드될 것이며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공부의 길을 밝혀 주리라 믿는다.
김지환 (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현재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