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소질이 있는 쉬테판이 김나지움에 진학하게 됐다.
누군가 쉬테판의 부모에게, 아이를 조금 큰 도시에 있는
카톨릭 음악 김나지움으로 보내라고 권유한다.
대성당 소년 합창단원으로 활약할 수 있고,
피아노와 바이올린 등 악기 지도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게다가 기숙학교라서, 외동으로 자라는 아이에게는 대단히 바람직한 조건인 듯하다.
그런데 그 부모가 서로 눈길을 주고 받는다. 그러더니...
"그따위 더러운 학교에는 보낼 수 없어요."
쉬테판의 부모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들이다.
하지만 쉬테판이 견진례를 치른 이후, 이들은 미사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는다.
동성애, 수도승과 비구니의 금지된 장난, 어린이 성추행 등
카톨릭 교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행이 그들의 발걸음을 묶어 놓은 것이다.
카톨릭이라는 말이 기독교에서 사용된 이후 내부의 추문이 끊임 없이 이어졌다.
그에 따라 스스로의 정화에 대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림돌이 떡 버티고 있다.
이런 불미스런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갖추기 보다는,
숨기고 덮어 주는 걸 미덕으로 삼는 행태가 예나 이제나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올해 일흔 살이 되는 알로이스 R 의 피눈물 나는 경험에 대한 고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알로이스가 열여섯 살 되던 해, 시골 마을 교회에 새로운 신부가 부임했다.
활달한 성격으로 금방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이웃 아저씨처럼 친절하고 다정해 보이는 그의 태도 때문에 어린이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스키와 축구를 즐기는 스포츠광이기도 했고,
특히 청소년 축구단을 조직해서 직접 지도도 하는 등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구축했다.
1959 년 겨울, 학교에서 단체로 스키휴가를 떠났다.
공교롭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신부가 통솔 책임자로 따라갔다.
그날 밤 신부가 알로이스를 따로 불러내서는, 스키에 소질이 있는 학생이라며 칭찬했다.
평소 알로이스는 무슨 일에든 모범을 보이는 신부를 대단히 좋아하고 따랐다.
신부의 신임을 얻고 싶은 마음을 은근히 품고 있는 학생들이 많았기에,
자기가 이렇게 칭찬을 들으니 마치 큰 상이라도 받은 듯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부가 알로이스를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함께 목욕을 하자고 했다.
알로이스는 아무런 생각 없이 욕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신부의 행동이 참으로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열여섯 살... 이미 다 성장했고 알만큼 아는 나이였지만,
당시 신부의 행동은 어딘가 미심쩍었다.
그때까지 아직 실제적인 경험이 없던 알로이스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는 신부의 희생 제물이 되고 말았다.
"오늘 여기서 있었던 얘기를 아무한테도 하면 안 돼. 친구들이 알면 너를 따돌릴 거야.
부모한테도 말하면 안 돼. 마을에 소문 나면 네 부모들까지 나쁜 사람 취급을 받게 될테니까."
신부의 말이 알로이스의 머리와 가슴을 마구 흔들었다.
그날 이후 알로이스의 세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학교 공부와 여가 생활에 흥미를 잃고, 온종일 말을 하지 않는 날이 늘어갔다.
다른 마을에 살던 그의 친척이 알로이스를 추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로이스와 신부의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온 마을에 퍼졌고,
신부가 법정 호출 명령을 받았다.
그때부터 알로이스의 삶은 지옥보다 더 지독하게 바뀌었다.
동네 사람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신부를 고발한 파렴치한..... 알로이스에게 가장 먼저 던져진 돌멩이였다.
당시 시골 마을의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회가 곧 하늘이었고,
교회를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오른팔이었으니까.
그런 엄청난 존재를 법정에 서게 만든다는 사실은 천인공노할 역적질이었던 것이다.
특히 나이든 노파들이 그의 집안 전체를 더럽게 취급하고 손가락질했다.
하루는 식료품 가게 주인이 그의 엄마에게 말했다.
"당신한테는 아무 것도 팔고 싶지 않으니까 앞으로 우리 가게에 오지 마세요."
나중엔 알로이스의 친척들마저 창피하다며 그를 피했다.
알로이스의 가족 뿐 아니라 그의 친척들 모두 교회를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들 옆에 앉기 조차 꺼리는 등 멸시하는 태도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알로이스의 고모나 삼촌 역시 조카를 원망했다.
교회에 못가는 일요일이 괴로웠다.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알로이스의 부모 또한 아들을 위로하고 보살피기 보다는 원망의 눈길로 대하기 일쑤였다.
모든 책임은 알로이스에게 있는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신부가 아무런 형도 받지 않고 풀려났다.
그는 법정에서, 아이가 오히려 신부를 유혹했다고 허위 진술을 했던 것이다.
자기는 다만, 아이를 교육적으로 설득하고 위로해 주었을 뿐이라고.....
집행관들이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신부가 하는 말에는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가 문제였다.
2011 년, 교황 베네딕투스 16 세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카톨릭 신부로부터 동성애적 피해를 입은 다섯 명에게 면담 기회가 주어졌다.
알로이스도 그중 하나였다.
한 사람한테 주어진 시간은 단지 15 분에 불과했다.
기나긴 고통의 내력을 이 짧은 순간에 어떻게 속시원히 털어낼 수 있으랴...
하지만 수십 년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온 알로이스에게는
그나마 벅찬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속에 뭉쳐 있던 응어리는 다소 풀어졌어요.
교황은 듣고 있다가, '대단히 유감스럽다' 는 위로의 말을 한 마디 했을 뿐입니다만."
알로이스의 일생을 망친 신부는 이후에도 미성년자와의 동성애 관계가 드러나
1 년 4 개월 형을 선고 받았지만, 질병을 이유로 곧 풀려났다.
기독교가 국교인 나라에서 드물지 않은,
성직자에 대한 무조건적 존중이 빚어낸 결과임에 틀림없다.
최근, 카톨릭 희생자들을 위한 협의회가 구성되고, 문제 해결에 관한 공식 발표후
카톨릭 본부에서 5000 유로를 알로이스에게 송금했다. 소위 위로금이었다.
그는 올해 일흔 살이다. 쉰네 해 동안 그의 삶이 과연 진정한 삶이었을까?
5000 유로로 그의 삶이 대체 무슨 보상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알로이스 사건과 직접적 관계는 없지만,
맨위에서 언급한 도시는 카톨릭 교회로 인해 말도 탈도 많은 곳이다.
광장 한 가운데 화려한 대성당이 당당히 자리잡은 도나우 강변의 아름다운 도시...
이 아름다운 도시의 아름다운 대성당에서 때로는 아주 추악한 일이 벌어진다고 한다.
알려지지 않은 사건까지 합치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과연 이 도시만 문제일까?
카톨릭 사제들의 동성애, 특히 소년을 대상으로 한 범죄 문제는
최근들어 유난히 크게 자주 부각되고 있다.
옛날에는 수녀들과의 관계가 주된 문젯거리였다.
당시엔 동성애라는 주제에 그 누구도 귀를 기울이거나
입을 열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묻혀졌을 가능성이 크다.
카톨릭 신부들도 초창기에는 결혼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1 세기말경 결혼 금지령이 내렸다.
신부들이 교회 재산을 직접 관리하면서
그걸 자녀들에게 일방적으로 상속해 버리는 행위가 비일비재했는데,
당시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교황이 폐습을 뿌리뽑기 위해 내린 조처라고 한다.
이제 다시 개혁이 필요한 시대가 온 걸까??
신부가 다시 결혼할 수 있는 세상이 되면 모든 게 정화될까??
답은 이미 나와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신교회 목사들은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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