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산(天寶山)
양주시 양주동과 회천동에 걸쳐있으며 의정부시, 포천시, 동두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천보산은 길게 걸쳐있어서 마을과 마을을 넘어다니던 고개가 많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조선 초기에 태조가 무학대사와 함께 회암사를 찾을 때 넘었다고 하여 붙여진 어하고개, 차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거나 혹은 호랑이 때문에 백명씩 모여 다녀야 하는 고개라 하여 붙여진 백석이고개, 회암동에서 포천으로 넘어가는 회암고개, 율정동에서 포천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돌문이 있던 고개라 하여 석문령이라는 고개가 있다.
천보산이란 이름은 15세기 전반의 사실을 반영하여 태종실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이밖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 동여비고(1682) · 해동지도(1760) · 여지도서(1757~1765) · 팔도군현지도(1767~1776) · 동국여도(1801~1822) · 양주목읍지(1842) · 동국여지지(19C중엽) · 대동여지도(1861) · 대동지지(1864) · 양주목읍지(1871) · 조선지지략(1888) · 양주군읍지(1899) · 양주읍지(1899) · 증보문헌비고(1908) · 신편조선지지(1924) · 조선환여승람(1937)에서 확인된다.
천보산 산자락 주변에는 고려 말에 세워진 회암사가 있던 회암사지(사적 제128호)와 회암사무학대사홍융탑(보물제388호), 회암사쌍사자석등(보물제389호), 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제51호), 회암사지 박물관 등이 있다.
칠봉산(七峰山)
칠봉산(七峰山)은 일곱 봉우리가 뚜렷이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은 9~10월경에는 아름다운 단풍나무 사이로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펼쳐있어 금병산(錦屛山)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어등산(於等山)으로 불렸으며, 어등산의 한자는 ‘어등산(於等山)’ 이외에도 ‘어등산(御登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몇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첫째,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많은 신하를 참형에 처한 것을 후회하여 널리 사찰을 찾아다니다가, 탑동에 위치한 상봉(上峰)을 국사봉(國射峰)으로 정하고 이 산을 지나갔기 때문에 어등산(御登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는 세조가 이 산에서 내촌(內村) 마을을 보고 신하들에게 저 마을은 무슨 마을이냐고 물으니 신하들이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에 세조가 “앞에는 산이 있고 회암천(檜岩川)이 흐르는데다가 뒤에 또 산이 있으니 ‘안말’이겠군”이라고 한 후 ‘안골’로 불리다가,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내촌(內村)으로 불렸다고 한다.
칠봉산에 있는 일곱 봉우리의 땅이름 유래는 다음과 같다.
① 임금이 처음 등산하기 위해 떠난 곳이라 하여 발리봉(發離峯),
② 임금이 수렵에 필요한 매를 날렸던 곳이라 하여 응봉(鷹峯),
③ 임금이 수렵하러 나가 수렵표시 깃발을 꽂았다 하여 깃대봉(旗臺峯),
④ 임금이 돌이 많다고 말한 곳이라 하여 석봉(石峯),
⑤ 임금이 이곳에 쉬니 시위(侍衛)군사가 갑옷투구를 풀어놓았다 하여 투구봉(鬪具峯),
⑥ 임금이 떠나며 돌이 많으니 뜻하지 않은 일에 조심하라고 당부하였다 하여 돌봉(突峯),
⑦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준비를 하던 곳이라 하여 솔리봉(率離峯)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