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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의 땅' 이태원 변천사

긴 긴 시간 2013. 6. 17. 03:46

'이방인의 땅' 이태원 변천사

입력
2010-04-13 10:24:10
수정
2010-04-13 10: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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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軍→일본군→미군 차례로 주둔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돼 왔다.

'이태원'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효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러 학설이 있다.

우선 효종 때 동네에 배밭이 많았다는 이유로 배나무 이(梨)가 붙은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해 살았다는 의미로 '이타인(異他人)'이 어원이라 보는 접근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여서 다를 이(異), 태반 태(胎)자를 써서 이태원(異胎圓)으로 불렸다는 일부 학계의 주장도 있다.

어원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태원은 이방인 공동체 지역의 성격이 강한 곳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군사지역으로서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겼다.

1960년대 말까지 미군대상 매춘업소가 남산3호터널 입구부터 이태원 입구까지 해방촌과 삼각지 파출소 뒷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 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가 조성됐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쇼핑지구가 형성돼 88올림픽 당시 이태원 상가 점포는 1천800개에 이를 정도로 쇼핑의 중심지로 주목받기도 했다.

올림픽 기간에는 하루 평균 6천명의 외국인이 이태원에서 약 3억 달러를 사용했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논문도 있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연출한다.

남산 기슭의 하얏트호텔과 이태원동, 한남동 일대에는 외국공관을 중심으로 부유한 외국인이, 이태원로 남쪽의 이태원동과 보광동 일대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들어온 외국인과 국내 저소득층 주민이 주로 분포해 있다.

1997년 서울 최초의 외국인 관광특구로 지정돼 외국인 관광객도 즐겨 찾는 곳이 됐다.

그러나 이태원 상권은 88올림픽 이후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점차 줄고 서울시의 퇴폐업소 단속 강화, 1990년대초 `범죄와의 전쟁' 등으로 눈에 띄게 위축됐다.

여기에 강남이나 신촌, 홍대입구 등 새로운 유흥지역이 등장하고 1980년대 이후 미군 사병이 이태원 외출을 삼가는 분위기마저 형성돼 불황을 겪었다.

이태원은 이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건너온 외국인이 서서히 새로운 상권과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다.

(고상민 김연숙 배영경 송혜진 조민정 황정현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