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자본주의의 상징인 맥도날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간편한 식사이다. 전 세계적으로 메뉴가 보편적으로 고정되어 있고 값이 싸고 기다림이 필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구원을 보장하고 죽으면 영원히 부활한다는 오늘날 기독교는 영적 필요를 손쉽게 채워줄 뿐만 아니라 죽은 후 세계까지 보장해 주는 맥도날드 같은 것이다. 맥도날드가 요즘 세상에 모르는 사람이 없고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 갖가지 방법으로 끊임없이 광고를 하듯이 기독교도 그렇게 한다.
멜 깁슨이 기독교인들의 주머니를 털려고 작심하고 만든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채찍질 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자기 자신이 매를 맞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고 예수의 손에 박히는 대못을 바라보며 스스로의 손바닥에 통증을 느끼지만 그들의 눈에 속속 들어오는 타인의 고통들에 대해서는 고통의 주파수들을 감지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맥도날드 기독교의 특징이다.
이것은 기독교 특유의 논리 -대리 고통, 대리 속죄- 때문에 그렇다. 기독교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처참하게 사형 당함으로써 나의 고통을 대신 겪었다고, 그래서 나의 죄값을 대신 갚아주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신도들은 예수의 고통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들의 죄 많은 영혼들을 함께 떠올리고, 그 이미지를 스스로의 시뮬레이션 된 상황들에 연결시키고는 해방감을 맛보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바로 가장 자본주의적 종교가 될 수 있는 이유였다.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결국 가장 편의적인 종교, 많은 사람이 쉽게 믿고 투신 할 수 있는 즉 돈이 될 수 있는 종교인 것이다.
한국에 갔을 때 목도한 일이었다. 복잡하지 않은 한가한 전철 안이었다. 옷을 점잖게 입은 신사가 잔뜩 기브스를 한 목소리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를 힘차게 외치고 있었다.나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전철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저 사람이 저렇게 간절히, 고압적으로 외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람이 누구일까? 절대적이고 무한한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마치 엄마 잃은 아이가 엄마를 그리워하듯 사랑이 필요한 인간들이 지극히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어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 사랑은 인간을 눈멀게 만든다. 사랑을 하고 있는 자이거나 받고 싶은 자이거나 간에 어느 한 편에서 눈이 멀어야 진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지 양 쪽에서 자로 재기 시작한다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이 눈이 멀 리는 없고 인간이 눈이 먼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있을 때는 행복할 수 있다. 단, 현실에 의해서 꿈이 깨어질 때까지는.
계몽시대 이후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 인류는 더 이상 단순하고 달콤한 사랑이야기 만으로는 감동 받을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가 쇠퇴해 가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이제 인간들은 신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전혀 이해 못할 목사도 있을 것이다.
같은 직업에 종사하더라도 전문성에 따라서의 수준 차이가 많이 나는 법이지만 아마 목사만큼 차이가 많이 나는 직업도 없을 것이다. 같은 목사라도 유치원생과 대학생만큼 수준의 차이가 심한 것이 목사라는 직업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젊은 공익요원이 나타나더니 신사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그만하라고 만류를 했다. 공익요원이 계속해서 내리라고 강요를 해도 신사복은 완전히 무시하면서 천국복음을 계속 전파했다. 신사복은 몇 칸을 더 지나가며 전도를 하더니 마지못해 내렸다.
그런데 잠시 후 “구내에서 선교를 하는 분은 중단하고 내려 달라 ‘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성경말씀대로 끈질기게도 또 다시 다른 칸으로 가서 전도를 계속하는 모양이었다.
잠시 후 이번에는 탁하고 거친 목소리의 잡상인님이 나타나셨다.
한참 영업 중에 다시 공익요원이 나타나서 그만하라고 했다. 잡상인님은 쫓겨 가면서 “실업자가 500만이야. 나도 좀 먹고 살자. 죽을 수는 없잖아!”하고 큰 소리로 내 뱉었다. 절박한 그의 목소리는 비록 시끄럽고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였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소리였다.
어리석게도 앞에 천국복음을 전하던 사람은 자기 자신이 거대한 자본주의 톱니바퀴 속에서 굴러 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뒤의 잡상인님은 자본주의 톱니바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악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키스 외에는 도무지 맨 입으로 되는 일은 없다. 손으로 밥을 먹는 인도나 스리랑카 사람이 아니라면 하다못해 밥을 먹으려도 수저가 필요한 법이다.
태초 이래 가장 강한 힘은 돈이었다. 일시적으로 정치가, 종교가 돈을 좌우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돈에 흐름에 따라서 대세가 결정되었다. 종교의 전개 과정도 역시 돈과 직결 되어있다.
만약에 진리가 있다면 돈에 거슬리는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 까닭에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예수가 깡다구 좋게 성전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의 좌판을 둘러엎은 것이다.
그날 나는 이 시대에는 ‘하나님 사랑’이라는 상품을 선전하는 맥도날드식 기독교 보다는 성전을 뒤엎는 깡다구 있는 기독교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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