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라는 말의 본래 의미가 '(인간보다도) 자본(제일)주의'는 아닐테다. '이윤추구'라는 목적은 있지만 이것이 어떤 사회를 운영하기 위한 가치인 이상, 그 목적도 사회 구성원인 사람을 향해 굴러가야 마땅하다. 말하자면 '사람을 위한 돈'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현대 자본주의 속 대다수에게 돈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돈을 위한 사람'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존엄이 이윤추구를 최종목적으로 여기는 사회에 의해 희생된다. 권력보다도 더 무서운 힘으로서, 돈은 마음만 먹으면 인간에게 가장 끔찍한 고통을 가할 수 있다.
이런 현실의 부조리 앞에서 영화와 같은 대중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분을 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가장 쉬운 일이다. 극단적인 사례 몇 개만 발견해도 그 부분을 극대화시켜서 대중의 속을 끓게 할 수 있다. 문제는 발견과 행동이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섬세하게 발견하게 하는 것도, 그리고 단지 분노와 복수 같은 영화적 감정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지를 제시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약속>은 그 쉽지 않은 일에 있어 성과를 올렸다. 지속적이고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나온 결과물은 완전히 매끄럽진 않으나, 이 영화는 그런 면으로만 판단하기 어렵다.
속초에서 30년 가까이 택시운전 일만 해 온 상구(박철민)에게는 비록 넉넉치 않은 환경에도 든든하고 사랑스러운 가족이 있다. 묵묵히 뒷바라지해주는 아내 정임(윤유선), 한창 반항할 시기인 아들 윤석이(유세형), 그리고 착하고 야무진 큰딸 윤미(박희정).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한 윤미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진성반도체 취업이라는 희소식을 전한다. 대기업에 입사하게 된 큰딸이 더할 나위 없는 동네 자랑거리였던 상구는 그로부터 불과 20개월 뒤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윤미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것이다. 힘겨운 투병의 나날을 보내던 중 상구네를 찾아온 진성반도체 인사실의 이 실장(김영재)은 설상가상으로 윤미가 사직해야 한다고 통보한다. 회사에서 일하다 단기간에 생긴 병인데 산재가 아니냐며 항의해 보지만 회사 측의 입장은 줄곧 '개인적인 질병일 뿐'이라는 싸늘한 대답. 결국 별다른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윤미는 고통 속에서 가족의 곁을 떠나고, 상구는 자신의 품 안에서 식어간 윤미를 향해 너의 죽음이 당당히 인정받게 하겠노라는 약속을 한다. 그렇게 윤미의 죽음이 산재임을 인정받기 위한 상구의 싸움이 시작되고, 빠듯한 환경에서도 여전히 노동의 정의를 추구하는 노무사 난주(김규리)가 지원에 나선다. 그러나 다른 것도 아닌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돈을 가지고 가족을 때론 회유하고 때론 위협하는 진성반도체의 횡포 앞에서, 상구와 가족은 피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다. 상구와 가족은 과연 윤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아시다시피 <또 하나의 약속>은 2003년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입사한 후 2년 만인 2005년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2007년 세상을 떠난 故 황유미 씨와 그의 아버지 황상기 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었던 스무살 청춘의 믿을 수 없는 죽음은 이미 시놉시스만으로도 관객의 눈물을 마음껏 이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또 하나의 약속>은 그런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파릇파릇한 딸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 이후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사람들의 투쟁이다. 자본주의의 냉엄한 논리에 존엄이 희생된 인간의 모습에 마냥 슬퍼하고 분노하는 것을 넘어서, 그런 절망을 겪은 이들이 어떻게 털고 일어나 극복하는지, 자신들을 이렇게 만든 사회에 어떻게 맞서나가는지를 따라간다. 이 맞선다는 것은 개인적 보복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이런 경우 없는 일을 겪지 않도록 앞서서 길을 닦는, 미래지향적인 저항이다. 세상의 부조리를 폭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부조리 속에서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으며 할 수 있는지를 실제 사건을 통해 질문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약속>은 그 자체로 대단히 유의미한 영화다.
영화적 완성도로만 봤을 때 <또 하나의 약속>이 마냥 만족스러운 수준인 건 사실 아니다. 실제 인물과 사건, 사회적 문제 제기와 각종 외압설 등의 공통점을 지닌 <변호인>과 비교하면 확실히 그렇다. 제작비가 촬영 시작부터 충분히 모아진 것이 아니라 제작두레에 따라 기부금이 지속적으로 모아지는 과정에서 촬영을 이어간 경우라, 완급조절이 군데군데 좀 성긴 느낌도 있다. 대사도 다소 연극적인 부분이 있어서, 대단히 평범한 대사로도 높은 감정적 파고를 이끌어낸 <변호인>과 비교하면 대사로 인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도 다소 기대에 못미치는 느낌이다. 예상외로 영화의 시선이 윤미의 아버지인 상구 한 명에만 집중되지 않고 다양한 인물을 고루 비추다 보니, 관객의 주의를 장악하는 힘도 좀 아쉬운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 부분 같은 경우는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 고유의 장점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대기업이라는 골리앗과 싸우는 아버지라는 다윗의 이야기로 철저히 이분법화될 줄 알았던 영화는 의외로 그렇지 않다. 윤미의 사망이라는 사건을 시발점 삼아서, 영화는 시종일관 상구의 편에만 서는 것을 거부하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을 두루 살피기 시작한다. 여기에는 기업이 제시하는 거액의 돈에 흔들리면서, 한편으로는 남편이 보상금을 두둑히 받으려 그런 위험한 일을 벌인다는 주변의 수군거림도 감당해야 하는 아내 정임도 있다. 힘들어하는 가족의 모습 속에서 떠안을 필요가 없는 죄책감을 떠안으며 마음도 타들어가는 딸 윤미도 있다. 돈보다 정의를 택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 속에서 맨땅에 헤딩하기가 두려운 노무사 난주도 있다. 회사 일로 인해 자신의 몸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수십년간 자신을 먹여살린 회사를 배신할 수 없는 노동자 교익도 있다. (그 와중에 아들 윤석의 반항과 반성이 잘 부각되지 않는 건 아쉽다.) 많은 이들의 다양한 아픔들이 있어 더 아프지만, 그만큼 더 따뜻하다.
영화는 윤미의 사망을 둘러싸고 투쟁하고 갈등하고 번뇌하는 인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비추면서, 그들을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한다. 기업에 맞서는 평범한 사람들과 기업 안의 사람들을 적대적 관계로 몰아세우는 대신, 밖에서 투쟁하는 이들도 안에서 지키려는 이들도 결국 다 같은 인간임을 잊지 않는다. 심지어 상구네 가족에게 가장 모질게 구는 진성반도체 인사실 이실장에게도 포용을 암시하는 일말의 손길을 내미면서,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서로가 아닌 잘못 나아가고 있는 사회임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이 싸움의 목적은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함이 아닌, 흠결을 치유하고 함께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오랜 고민 끝에 증인으로 나선 진성반도체 측 직원이 법정에서 "난 정말 우리 회사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이 영화가 '붕괴를 원하는 분노'가 아닌 '건설을 원하는 연대'에 관한 이야기임을 실감케 한다.
'함께'라는 단어는 <또 하나의 약속>에서 매우 중요하다. 상구가 난주와 다른 유사 피해자들과 함께 만들어 나가는 연대는, 단지 현실의 부조리를 목격하는 것을 넘어 부조리와 맞서기 위한 행동으로 이어가는 중요한 열쇠다. 물리적 폭력을 쓰지 않고 물질적 압박으로 승부하는 대기업의 횡포는 조용하고 그만큼 섬뜩하다. 별다른 핏빛 선전포고 없이도 돈을 통한 회유로, 생계가 끊길 수 있다는 협박으로, 일자리를 통한 유혹으로 당장 먹고 살 걱정이 우선인 소시민들을 떨게 한다. 게다가 이런 위험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과거의 이야기나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직장에 몸을 담고 있는 누구라도 당장 만날 수 있는 현실의 문제이다. 그런 만큼 혈혈단신의 분노나 보복 같은 것은 영화적 카타르시스는 마음껏 끓어오르게 할지 몰라도 판타지로 머물 수 밖에 없다. <또 하나의 약속>은 더 교묘하고 조용해지고 있는 자본주의의 압박 속에서, 역시나 조용한 데다 더디지만 지속적으로 시민들의 연대가 형성되는 과정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자본도 빽도 없기에 이들이 힘을 뭉쳐 당장에 부조리를 일망타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들이 만든 '또 하나의 가족' 안에서 적어도 그들은 비슷한 아픔을 겪는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서로 돌봐주고, 설령 자본 권력에 이기지 못해 쓰러질 위기에 처해도 붙잡아주고 끝까지 끌어줄 사람들을 만난다. 분노는 감정이지만 연대는 행동이다. '돈을 위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돈'이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그들의 자발적인 연대는 <또 하나의 약속>이 고발영화 이상의 이야기, '보자'가 아니라 '인식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함께 고민하자'고 말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또 하나의 약속>은 섣불리 격분하기보다 시종일관 침착하지만,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는 관객을 시종일관 울컥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이 영화로 첫 주연이 된 상구 역의 박철민은 '코미디를 잘 하는 배우는 연기를 잘 하는 배우'라는 정의가 옳음을 새삼 확인시킨다. 감정적으로 과도하게 폭발하지 않으면서도, 깊게 패인 주름과 그 안에 습관처럼 자리한 미소 어린 표정은 앞세운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조용한 의지를 충실히 반영한다. 웃음기를 찾기가 쉽지 않은 캐릭터이지만, 간간이 여유로운 장면들에서 던지는 여전한 유머와 함께 아버지의 소박하지만 결연한 모습이 담긴 그의 연기는 인간적이기 그지없다. 상구의 아내 정임 역을 맡은 윤유선의 연기도 매우 훌륭하다. 딸의 죽음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때론 거부하기 힘든 유혹 앞에 자신을 탓하기도 하지만, 결국 힘든 싸움을 시작한 남편을 묵묵히 다독이는 아내의 모습을 뜨겁게 펼쳐보인다. 액션은 절제하지만 감정은 파도처럼 일렁이는 이들의 연기 속에서 눈물을 들키지 않기란 쉽지 않다. 안타깝게 생을 일찍 마감하는 큰딸 윤미 역의 박희정,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 속에서 엇나가는 아들 윤석 역의 유세형은 신인임에도 야무지고 깔끔한 연기로 베테랑 배우들과 대등하게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수혜자와 피해자의 중간지점에서 갈등을 겪는 진성반도체 장기근무자 김교익 역의 이경영, 상구로부터 오히려 삶의 자세에 대해 배우는 노무사 난주 역의 김규리, 첫인상은 괴짜지만 안 그런 척 정의로운 변호사 역의 박혁권, 판사 역으로 특별출연한 정진영까지 넉넉치 않은 제작환경 속에서도 베테랑 배우들의 포진 덕에 영화는 충분히 풍성하다.
상구는 딸을 떠나보내기 전 후 심심치 않게 울산바위 이야기를 꺼낸다. 설악산에 있는 울산바위에는 천하에 하나뿐인 비경을 만들고자 전국 각지에 있는 바위들이 금강산으로 모였는데, 그 중 울산에 있던 울산바위가 몸이 무거워 미처 금강산에 이르지 못하고 설악산에 눌러앉았다는 전설이 있다. 상구는 울산바위가 바라다 보이는 앞에서 딸을 보내며, 주저앉지 않고 일어서 나아가겠다는 결심을 한다. 부조리 앞에서 주저앉아 그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몸이 무겁고 지쳐도 계속 나아가겠다는 결심 말이다. 그리고 그 결심의 밑바탕에 사람들이 자리한다. 택시기사 생활 30여년을 하다 보니 사람 얼굴만 봐도 누가 어떤지 대번에 안다는 그의 말에는 '사람을 향한 믿음'이 깃들어 있는 듯 하다. <또 하나의 약속>이 미숙한 자본주의를 고발하고 여기에 맞서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바탕에 깔고 있는 것 역시 '사람에 대한 믿음'일 것이다. 사람을 믿는다면서, 단지 그 사람이 대기업의 편에 있다고 '당신은 우리의 적이야'라고 주먹을 들 순 없을 것이다. 금방 끓지만 금방 식는 분노를 이끌어내기 위해 몇몇을 적으로 내세우지 않고 모두가 사람임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려는 영화의 모습에서, 단죄하고자 하는 서늘함 대신 더 좋은 세상을 향한 열정과 애정이 보인다. 비록 영화적 완성도에서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 해도, <또 하나의 약속>이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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