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관한 내용에 있어서도 그는(교황은) 분명히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는 자기 스스로의 판단이나 혹은 교서에 따라 이단을 가르칠 떄 오류를 범한다. 사실 많은 교황은 이단들이었다. - 교황 아드리안 6세 (1523년)
가톨릭 교인들은 교황 무오설에 대해 얘기를 하면 기분이 나쁠 수 있다. 혹시 내 얘기가 거슬려서 '할일 없는 양반'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솔직히 '김xx장관이 이랫다 씨x놈'이나 '박xx의원이 이랫다 개x끼' 등등 남 험담이나 하며 시간 때우는 것보단 보다 '경건한' 얘기를 하는게 났다고 생각한다. "아니, 교황이 무오하다고 교황 맘대로 다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칙령은 주님이 이끌어주시는 대로 발표되는 거니까 상관없지 않어? 도대체 왜그래? 개신교 새끼들 태클 거는 거 하고는... 먹사들 비리나 감찰하시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신교인이 아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칼뱅과 루터의 교리에도 분명히 오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개신교의 타락성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는 신앙이 순수했던 초대교회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개신교 교리들과 가톨릭 교리들이 초대 교회의 교리에서 많이 어긋난 부분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이를 밝히고픈 복음주의자이기도 하다. 게다가 나는 탐욕스러운 제임스 1세 영국 국왕에 의해 번역된 성경(킹제임스 성경:KJV)를 가지고 최고의 성경이다,무오한 성경이다 하며 떠받드는 멍청이들과는 다른 부류이니 오해하지 마시라. 아마 대부분의 가톨릭 교인들은 이 교리를 비롯한 모든 것이 사도 때부터 전승되오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초대 교회 교부들은 교황좌의 권위와 무오성에 대한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사실이다.(이 얘기는 차차 할 것이다)
우선 이 교리가 언제,어디서 시작됐는지 알아보자. 이름 꽤나 있는 학자들 얘기를 인용하는게 더 났겠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퀑은 이렇게 말했다.
"로마 가톨릭교의 무오교리의 근원에 관한 한 그것은 천천히 '발전'되거나 혹은 '전개'된 것이 아니라, 줄곧 이단으로 규탄을 받아왔으며, 비정상적인 프란시스칸 수도승 피터 올리비(1298년 사망)에 의해서 그의 일필휘지로 1200년대에 돌연히 창조된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도 올리비의 사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자가 없었다. 중세 교회법 전문가들도 신앙의 보존을 위한 교회가 무오한 교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무오설에 대한 현대의 비판은 당연히 성서와 가톨릭 전통의 후원을 받고 있다.
*피터 올리비의 이론은 교황 요한 22세에 의해 곧 공개적으로 정죄를 받았다."
하지만 비오 9세 교황이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황에 대한 복종을 구원의 요건이 되게 압력을 넣은 뒤부터 상황을 달라졌다. 그럼 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성한 사도 베드로가 모든 사도들의 왕자로 임명되지 않았다고 말하거나 투쟁적인 교회 전체(지상교회)의 가시적 수반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그리고 지체 없이 유일한, 으뜸되는 명예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나, 베드로가 교회 전체 위에 진정한 그리고 고유한 관할권을 가진 수반이 아니라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바로 이 베드로의 후계자가 교황들이다. 누가 감히 그들이 교회의 왕자이자 수반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당시 공의회는 수많은 추기경,대주교,주교,대수도원장,수도원장,신학자들이 모여있었다.
당시 공의회를 지켜보던 주 교황청 영국 대리 대사는 교황 무오설을 관철시키기 위한 준비가 얼마나 완벽하게 이루어져가고 있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외국으로부터 온 주교들은 그들의 의견을 자유로이 발표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죄하고자 원하는 것을 실제로는 강압에 의하여 인정해야 할 불쾌한 입장에 서있음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오거스트 버나드 헤슬러는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교황청 서기국'에서 5년간 일하는 동안, 바티칸의 비밀 문서를 접할 기회를 갖게 됐는데, 그가 발견한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내막들이 그의 신앙을 너무나 요란케한 나머지 '어떻게 교황이 무오하게 되었는가'란 책을 썼고, 원고 탈고 후 돌연한 죽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책의 서문을 썼다는 이유로 가톨릭 신학자 한스 퀑은 교편직을 박탈당했다.
"선거과정은 부정이었다." 대주교 죠지스 다아보이는 1869년 12월 20일자 그의 일기에 적고 있다. '본 회의 중 누구든지 교황청에 대하여 감히 반대발언을 감행하는 자들'은 침묵시켜 버렸다.
당시 가장 저명한 가톨릭 역사가이며 신학자인 J.H.이그나즈 될링거는 그가 47년 동안 로마 가톨릭교의 신학과 역사를 고수하며 가르친 대가로 파문당했다.
그의 저작 '교황과 공의회'는 출판되자마자 즉시 금서 목록에 붙여졌다.
비오 9세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을 주교들이 읽는다는 것은 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터툴리안,키프리안,렉텐티우스 등은 특별한 교황 특권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으며, 교리 문제 결정에 있어서 교황이 더 높은 권위를 갖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헬라 교부들인 유세비우스,성 아타나시오,성 대 바실,성 그레고리 형제,성 에피파니우스 등의 저서들 가운데 로마 교황의 특권에 관한 기록은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고, 이탈리아의 라틴 교부들인 힐러리,파시온,제노,설피시어스,암브로시우스도 마찬가지다. 특히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의 통일과 권위에 대하여 다른 교부들의 글을 합친 분량보다 더 많은 글을 썼지만, 그도 교황좌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헤슬러의 글에 의하면:
노바스코티아주 헬리팩스의 대주교 토마스 코넬리는 확신을 가진 교황무오설의 주창자로서 로마에 참석하였다. 이 문제를 철저히 검토하고 나서 이제는 분명한 반대자가 되었다. 그는 되풀이해서 초대 3세기 동안 기록된 문서 중에서 증빙서류를 제시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언제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그는 누구든지 그가 원하는 본문을 제시하는 사람에겐 1000파운드의 상금을 지불하겠다는 사적제안까지 했지만 그가 받은 모든 문서는 위조품들이었다.
추기경 구스타브 본 호헨로헤는 "나는 교황무오설을 반대함에 있어서 단지 이 사실외에 다른 어떤 주장도 필요없다. 즉 나는 나의 전 생애를 통틀어서 비오 9세보다 더 진리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은 사람을 본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루프 주교는 여러 주교들이 말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일들을 볼바에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번민과 좌절로 인하여 비통하게 되었고 병을 앓는 자도 있었다."
주교 게오르그 스트로스마이어는 "1차 바티칸 공의회는 진정한 공의회가 되는데 필요한 자유도 없었고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는 통과된 결의문을 정당화할 수 있는 자유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상당수가 이미 회의 만료전에 진저리를 내고 회의장을 떠났다.
투표 하루전인 1870년 7월 17일 55명의 반대를 선언한 주교들 역시 교황에 대한 경외심을 인하여 투표에 참여키를 원치않고 항의를 표한 뒤 로마를 떠났다.(주교들은 로마에서 단 두가지 일밖에 하지 못했다. 찬성표를 던지거나 로마에서 떠나거나!)
1870년 7월 18일 최종투표일이자 공의회 마지막 날에 가표는 535표에 불과 했다. 참가 인원의 절반도 미치지 못했지만 바티칸 신문들은 마치 만장일치로 통과된 것처럼 허위 보도를 했다.
헤슬러가 그의 연구기간 동안 바티칸 비밀도서실과 다른 문서들에서 수짐한 내용에서 발견된 비오 9세의 인격과 행실을 폭로하는 더 내밀한 정보들이 보여주는 비극적인 내용을 보자.
"불건전한 신비주의,유치한 격분,천박한 감정주의,간헐적 정신 이상,엄숙한 공식 연설 중에서 사용하는 비정상적인 발언 그리고 노인적 옹고집 모두가 현실 파악을 이미 상실한 증거를 보이고 있다. 이 모든 것 위에, 아직도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지 모르는 과대망상증의 많은 예들이 있다.
1866년, 비오 9세는 '나는 길이요,진리요,생명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시켰다.
1871년 4월 8일 헤리 볼 아르님 숙코우 백작은 독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공에게 비오 9세의 성공하지 못한 한 기적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그가 트리니타 데이몬치 교회를 지나가는 길에 교황은 교회 앞에 앉아 있던 한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실패했습니다."(그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니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한 그의 선조 교황(베드로)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 없이 기적을 행하려했다!)
역사가 페르디난드 그레고리 비어스는 1870년 6월 17일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교황은 그의 무오성 능력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한 불구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했다. 그 불쌍한 것은 한번 시도해보다가는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이에 하나님의 대행자는 크게
풀이 죽은 꼴이었다. 이 일화는 이미 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그는 정말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다른 분야에서도 과대 망상 증세를 보였고 심지어는 주교들까지도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병증세에 대해 말이 많았다.
가톨릭 교회 역사가인 프란츠 싸버크라우스는 그의 일기에 기록하길
" 교황 비오 9세에 관해서 듀 캠프는 나의 견해 즉 교황은 1848년 이후 정신적으로 병들었고 사악한 자라는 것에 공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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