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있는 이야기

[스크랩] 예술과 시장: 존 러스킨의 딜레마

긴 긴 시간 2014. 11. 18. 11:59

 연제: 예술과 시장: 존 러스킨의 딜레마
  연사: 이택광(광운대)
  좌장: 이순구(평택대)
  토론: 장정희(광운대) 유명숙(서울대)


존 러스킨의 예술론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문제의식은 바로 예술과 도덕의 관계이다. 러스킨은 취미판단을 도덕성으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무엇을 좋아하는가 하는 질문은 곧 당신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미학적 차원으로 윤리적 차원을 대체하고 동시에 그것을 인식론으로 혼동시켜버린 것이 러스킨 미학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러스킨에게 예술은 일상생활의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는 산업의 동반자였고, 예술 없는 산업은 야만성이었다. 러스킨의 예술론은 근본적으로 근대 계몽주의에 기초한 것으로서, 산업 없는 삶, 다시 말해서 근대화되지 못한 삶은 “죄악”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술은 고립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총체성과 결합하는 직접성(intimacy)이었다.

러스킨의 예술론은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러스킨이 “예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고상한 인간 존재가 현전하는 참 이미지를 관객 앞에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낙관주의의 표현이다(Lectures 82). 그러면서도 러스킨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런 이미지가 있는 그대로 현시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위대한 예술은 세 가지 주요 목적을 갖는데, 첫째는 인간의 종교를 강화하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의 윤리적 상태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고, 마지막은 이런 일을 물질적 구현을 통해 행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은 단순한 기교의 세련성이나 완성도를 의미하는 수준을 넘어갈 수 있다.

러스킨의 주장에서 당시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예술을 윤리 또는 도덕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러스킨은 “예술작품들은 대개 도덕성의 파괴로 여겨지는 것이 보통”이라고 인정한다(83). 그러나 그는 이런 일반적 견해에 반대하면서, “순수 예술을 비도덕적 목적으로 몰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순수”라는 것 자체가 인간을 고양시키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러스킨의 주장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순수(fineness)-선(goodness)-토대(base)”이다. 순수한 것은 선이며, 또한 모든 생명이나 물질운동의 토대를 이룬다는 것이 러스킨의 예술관에 원동력을 제공한다. 이런 관점에서 러스킨은 “예술-산업”을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구분한다. 이런 러스킨의 예술관은 여러모로 헝가리 문예학자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의 악명 높은 “건강한 예술과 병든 예술”에 대한 분법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특히 루카치가 러스킨과 유사하게 “작가의 윤리”를 거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흥미를 끈다. 물론 심미주의자 러스킨과 맑스주의자 루카치를 가르는 현실적 차이는 아주 분명하지만, 루카치의 예술관이 주로 신칸트주의(Neo-Kantianism)으로부터 수혈된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두 비평가 사이에 유령처럼 출몰하는 유사성을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러스킨에게 현실의 황폐함은 곧 예술에 대한 요청이다. 러스킨은 “폭력적이고 심지어 괴물스러운 범죄에 의해 황폐화된 문명의 시기에 최고의 예술적 기교의 순전한 천재성”이 꽃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24). 러스킨에게 문명의 황폐함이란 라틴어적 의미에서 “전체성의 상실”을 뜻했다. 이런 측면은 총체성의 상실을 현대 예술의 문제점으로 파악했던 루카치와 닮아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건강한 예술”이란 결국 현실을 총체적으로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예술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형식을 내용의 논리로 보고, 총체성을 담아낼 “더 나은” 재현 양식을 “리얼리즘”이라고 불렀던 루카치의 경우와 달리, 러스킨은 자연에 대한 모방(mimesis)야말로 세상에 만연한 악을 이기고 선이 승리하도록 만드는 예술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러스킨의 주장은 재현을 거부하고, 자연성의 구현을 “순수 예술의 본성”으로 보았던 독일 낭만주의의 이념을 연상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러스킨에게 중요한 것은 악과 선의 갈등을 통해 형성되는 최상급의 예술적 기교다. 이런 최상급의 예술을 구현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은 “질서와 사랑(Order and Love)”을 통해 가능하다(129). 이런 사랑의 질서는 “반항적이고 파괴적인 힘”을 가진 저급한 피조물의 상태를 거룩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예술은 이런 “순수 에너지”로서 절대적인 사랑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질서와 사랑은 인간의 본능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완전하기를 염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질서와 사랑은 개인적 이기심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 보편의 정념을 표출시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차원으로 이것을 번역한다면, 러스킨의 정념은 무의식의 보편적 구조를 이루는 욕망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욕망은 “물 자체”로서, 인간 의식 바깥의 물질세계가 아니라 인간 심리 내면에 있는 무의식적 내재장을 일컫는다. 이 내재장은 “~임(being)”이 아니라 “~됨(becoming)”이다. 러스킨이 노력의 최대결실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이런 됨의 문제였다.

러스킨은 예술성을 내재장으로 설정함으로써,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주류 문화에 대한 “비판(critique)”를 확보하고자 했다. 비판이란 것은 궁극적으로 “거리(distance)”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러스킨의 시대는 산업화의 시대였고, 시장의 논리가 서서히 모든 사회적 공공영역(public sphere)을 식민지화해 나갔던 시기였다.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에 따르면, 영국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공공영역이 최초로 정치적 영역으로 기능했던” 국가였다(Habermas 57). 이런 공공영역은 19세기로 넘어오면서 경제활동을 제외한 문화적 장을 의미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경제활동이 가능한 정치경제학적 영역은 공공영역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공공영역의 발달은 역으로 “사적인 것으로 전환된 개인”을 개인적 경제활동의 사적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48).

러스킨의 시대에 개인은 지극히 사적인 것으로서, 이는 궁극적으로 시장의 법칙을 떠난 내재장을 개인 속에 설정하는 계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주체성(subjectivity)는 “사적인 것의 가장 내밀한 중심”이었다(49). 이 내밀한 중심은 언제나 공공성과 통하는 것으로서, 이를 드러내는 것은 “영혼의 각인”이거나 “영혼의 방문”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의 문학이 편지라는 고백의 양식을 택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쨌든 러스킨에게 내밀한 사적인 중심의 설정은 빅토리아시대를 비판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러스킨은 샤를르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자본주의를 목격하고 있었다. 도심의 한 복판을 어슬렁거리는 만보자(flaneur)는 자본주의를 “거대한 인간의 사막(the great human desert)”이라고 표현한다(Baudelaire 12). 만보자가 찾는 것은 “근대성(modernity)”라고 불리는 특질이다. 보들레르의 만보자가 사막을 벗어날 방도는 없다. 그는 근대성을 탐색하기 위해 도심의 아케이드를 주유한다. 그는 구경꾼이자 소비자이고, 그에게 도시는 제 2의 자연이다. 

보들레르와 달리, 러스킨에게 도시는 별반 관심을 끄는 곳이 아니었다. 러스킨에게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펼쳐지는 물색의 향연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예술을 통해 자연의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런 러스킨의 예술관은 존 콘스터블(John Constable)의 영향이었다. 러스킨은 이를 토대로 과학적인 예술비평을 발전시키는데, 이런 비평에서 제기된 핵심적 주제는 주로 예술작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술적 기교에 대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구름의 진리”이거나, “산과 하늘의 진리”였다. 이런 까닭에 러스킨에게 도시란 것은 일시적인 타락이었다. 분명 보들레르와 다른 길에서 러스킨은 출발하고 있었다.

당시 러스킨의 예술관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바로 예술을 과학과 동일시한 것이었다. 그는 예술이나 과학이나 모두 자연의 진리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1871년에 이르러, 그는 이런 가설을 버겁게 방어한다.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와 벌어진 논전에서 이런 모습은 확연하게 드러난다. 헉슬리는 자연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은 기계적인 문제라고 지적하자, 러스킨은 왜 그렇지 않은지를 설명하기 위해 분투해야했다(Gombrich 234). 그의 반론에 따르면, 예술은 과학과 달리 현상이 아니라 외양(appearance), 말하자면 현상이 예술가에게 미친 효과를 분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을 그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그리게 함으로써, 예술가에게 장애로 작용한다. 러스킨의 입장은 예술적 실험을 지지하는 것인데, 그러나 이런 실험을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는 명확한 해명을 내어놓지 못했다. 곰브리치의 지적처럼, 러스킨이 바라마지 않았던 예술적 실험의 성과는 영국이 아니라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가능했다. 예술이 현상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외양의 인상(impression)을 분석하는 것이라는 이념은 그대로 인상파의 기치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을 감안했을 때, 러스킨의 예술관은 여러모로 보들레르와 비교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상파야말로 보들레르의 시학을 정확하게 이념화하고 있었던 유파였기 대문이다. 보들레르는 러스킨과 달리, 예술의 도덕성이 아니라 그것의 쾌락원칙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보들레르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아름다움(beauty)이었다. 보들레르는 “모든 시대가 특유의 걷기 방식, 눈길, 그리고 몸짓을 갖는다”고 말하면서, 근대에 걸맞는 예술의 출현을 기쁘게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한다(Baudelaire 13).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게 보들레르는 상품의 변증법을 드러내는 알레고리이다. 벤야민은 “보들레르로 인해서, 근대는 한 시기의 날인이자 동시에 고대를 전이시키고 전유하게 만든 에너지라는 것이 드러났다”고 말한다(Benjamin 236). 보들레르가 근대를 드러내는 방식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알레고리적인 것(the allegorical)”이다.  벤야민에게 알레고리적이라는 것은 모순을 지양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이미지라는 뜻이다. 보들레르에게 근대는 고대의 변용이다. 그는 근대를 구성하는 요소들, 다시 말해서, 패션, 아케이드, 예술, 건축 같은 것들에서 고대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런 맥락에서 벤야민은 “고대적인 것에 찍힌 시간의 날인이 알레고리적 조형을 만들어낸다”고 표현한다.

보들레르라는 알레고리는 그 자체로 시장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인은 판매자이자 동시에 소비자이다. 이런 맥락에서 시인은 곧잘 매음녀와 동격으로 놓여서, 시장에서 노동력을 팔고, 그 대가로 물건을 사는 노동자로 비유된다. 보들레르가 시장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은 “신비화”이다. 벤야민은 이런 보들레르의 신비화 전략을 “위악적 마법”이라고 정의하면서, 매음녀의 전략과 비슷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보들레르의 전략과 달리, 러스킨은 칸트 미학의 원칙에 따라 예술과 도덕의 연관을 통해 쾌락을 보편적 진리에 대한 증거로 채택한다. 이런 까닭에 그에게 예술의 쾌락은 “진리의 이념,” “미의 이념,” “관계의 이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Genius 42).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진리의 이념이란 결국 자연을 소박하게 닮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명백하게 보들레르가 목격했던 근대의 본질과 예술을 대치시키는 것이었다.

러스킨의 예술관은 많은 부분 독일 낭만주의 철학의 영향 아래 있었다. 그에게 위대한 예술이란 위대한 이념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43). 그러나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그는 어떤 이념을 담고 있어야 위대한 예술인지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 말하자면, 러스킨에게 예술은 산업사회의 출현으로 유령화되어 갔던 자연에 대한 유토피아적 충동을 표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유토피아적 충동을 내재화함으로써 그의 예술관은 “고급 예술”과 “저급한 집단”을 구분하고, 이를 근거로 비판을 도출해내어 사회개혁 담론을 생산했다. 그에게 이상적인 것(the ideal)은 세계를 구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57). 자연주의적 이상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고상하게 표현해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에게 진리는 헤겔적 의미에서 전체를 지시했지만, 동시에 산업사회가 지양되어버린 이상적인 것을 뜻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예술관은 시장과 순수 예술 사이에 조성된 딜레마에서 잉태되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보들레르가 근대 파리의 자본주의를 드러내주는 알레고리였듯이, 러스킨도 근대 예술의 딜레마를 솔직하게 증언하는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가장 무서운 적 !!! -게으름

 

 

왜 게으른 사람이 생기는가?

사람은 천성으로 내버려두면 누구나 다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태만에 저항해야 한다.

 

무슨 일을 시작하려면 여러 가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있다.

 

첫째 장애물은 바로 당신의 태만이다.

기질상 어느 정도 활동적인 사람도 그 천성을 따른다면 일보다 놀기를 선택할 것이다.

 

태만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은

하루에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습관적으로 일을 하는 점에 있다.

모든 인간적 미덕은 그것이 습관화 됨으로써 비로소 그 사람의 소유가 된다.

 

 

안일, 낭비, 무절제, 인색 이런 것이 모두 습관에서 조장되듯이

근면, 절제, 성실, 관용 같은 미덕도 습관에서 키울 수 있는 것이다.

 

- 러스킨의 이론

 

 


천재 예술 비평가 존 러스킨 ▒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2.8~1900.1.20
※ 생애

영국의 비평가 ·사회사상가. 예술미의 순수감상을 주장하고 "예술의 기초는 민족 및 개인의 성실성과 도의에 있다"고 하는 자신의 미술원리를 구축해
나갔다.

※ 업적

런던 출생. 런던의 부유한 포도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캘빈주의자인 모친의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부친을 따라 유럽 여러 곳을 여행하여 미술과 문학에
대한 취미를 길렀고 그림을 배웠다.

부친의 넓은 문학적 취미와 낭만파 시인의 작품, 모친의 교육에서 성서를 접하면서 그의
문학적 경향이 굳어져갔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옥스퍼드대학 재학 중에
이 뜻을 버리고, 졸업한 이듬해인 1843년 낭만파의 풍경화가인 J.터너를 변호하기 위하여 쓴
《근대 화가론》(5권, 1843∼1860)의 제1권을 익명으로 내어 예술미의 순수감상을 주장하고
"예술의 기초는 민족 및 개인의 성실성과 도의에 있다"고 하는 자신의 미술원리를 구축해
나갔다. 이와 함께 《건축의 칠등(七燈)》(1849) 《베니스의 돌 The Stones of Venice》
(1851∼1853) 《참깨와 백합》(1865) 등의 대표작을 냈다.

1860년 이후에 그의 관심은 경제와 사회문제로 돌려져 사회사상가로서의 활동으로 전향,
전통파 경제학을 공격하고 인도주의적 경제학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예술의 경제학》
(1857)과 1860년에는 《최후의 사람에게》, 1862∼1863년에는 《무네라 풀베리스》를 발표
하여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인간개조를 통한 사회개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 조지조합'을 설립하고 부친의 유산을 희사하였다.

1869년 모교인 옥스퍼드대학 미술교수로 임명되어 미술관을 창설하였으며, 저술과 사회활동
으로 쉴 사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활동으로 건강을 해쳐 1878년 정신이상
을 일으킨 이래 자주 착란상태에 빠지다가 1889년 이후에는 회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병 가운데서도 틈틈이 쓴 미완의 자서전 《지나간 일마저》(1885∼1889)는 명문으로
알려진 그의 저서 중 가장 뛰어난 문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시나브로
글쓴이 : Simon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