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론> 재벌총수의 한심한 도덕성
(서울=연합뉴스) 멀쩡히 가족을 두고도 혼외관계를 가져 자식까지 낳았다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고백에 국민은 어안이 벙벙하다. 최 회장은 한 일간지에 편지를 보내 부인인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과의 이혼 계획을 밝히면서 혼외관계도 털어놨다. 성격 차이 등으로 인해 노 관장과의 결혼생활은 이미 오래전 사실상 파탄났으며 '법적인 끝맺음'이 여러 사정으로 미뤄지는 사이에 다른 여자를 만나게 됐고 아이까지 갖게 됐다는 것이 최 회장의 설명이다. 최 회장은 "언제까지나 숨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지극히 개인적인 치부이지만 이렇게 밝히고 결자해지하려고 한다"면서 "우선은 노 관장과의 관계를 잘 마무리하고 저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와 아이 엄마를 책임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최 회장의 인간적인 고뇌와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혼외관계는 어떻게 포장을 하든 부도덕한 행위이다. 최 회장이 부적절한 관계로 혼외자를 낳은 '수년 전'은 지금은 폐지된 간통죄가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여서 당시 기준으로는 엄연한 범죄이기도 하다. 한순간의 실수도 아니고 작심한 외도 끝에 혼외자식까지 두게 됐다면 전근대적인 '축첩(蓄妾)' 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 회장은 80여개 계열사에 8만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국내 재계 3위의 대그룹 총수다. 그의 부도덕한 행위가 단지 사생활의 영역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다. 앞으로 사내 성추행 사건이나 패륜 행위로 지탄받는 임직원이 나온다면 최 회장이 무슨 낯으로 그들을 질책하고 징계할 것인가. 최 회장은 그렇지 않아도 이런저런 범법행위에 연루돼 두 차례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끝에 두 번 모두 특별사면을 받아 총수 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국민정서가 부정적인데도 불구하고 두 번씩이나 그를 사면한 것은 기업을 잘 경영해 일자리를 늘리고 성장에 기여함으로써 과거의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자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추문을 접하면서 최 회장에게 거듭 기회를 준 것이 합당한 처사인지, 기업활동으로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도덕성은 무시해도 괜찮은 것인지 회의를 갖게 된다.
최 회장은 사면받아 출옥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편지에서도 "모든 에너지를 고객, 직원, 주주, 협력업체들과 한국경제를 위해 온전히 쓰겠다"면서 '경제 살리기로 속죄한다'는 논리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려서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한 출옥 소감과는 달리 이번에는 가족들에게도, 사원들에게도, 주주들에게도, 국민에게도 '죄송하다'거나 '용서를 빈다'는 형식적인 말조차 없다. 그가 편지에서 쓴 대로 "어디에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지" 몰라서였는지, 아니면 굳이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봤기 때문인지는 본인이 입을 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족 간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최 회장의 외도로 애꿎은 SK 계열사 직원들과 주주들이 덤터기를 쓰게 됐다. 회장의 추문에 마음고생 해야할 SK 직원들이 가엽다. 그의 혼외관계가 알려진 후 기업이미지 타격과 이혼에 따른 지분관계의 혼란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매물을 쏟아내면서 주력기업인 SK텔레콤 주가는 29일 장중 6% 이상 폭락했다.
재계 이익을 대변하는 단체들은 걸핏하면 우리나라의 '반기업 정서'가 지나쳐 기업활동에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용어부터가 잘못됐다. 국민은 봉건시대의 영주라도 되는 양 아무 거리낌없이 부도덕하고 염치없는 짓을 저지르면서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일부 재벌 기업인의 행태를 문제 삼는 것일 뿐 수많은 사람의 소중한 일터인 기업 자체에 반감을 품을 이유가 없다. 기내 서비스가 잘못됐다면서 이륙 직전의 항공기에서 사무장을 내리게 한 재벌 회장 딸, 경영권을 놓고 사생결단으로 맞붙은 형제, 아들을 폭행한 주점 종업원들을 불러내 직접 보복폭행한 재벌 회장,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탱크로리 기사를 야구 방망이로 폭행하고 '매값'이라면서 2천만 원을 던져준 재벌 방계 회사 대표 등의 사례를 보면서 국민이 재벌에 대한 반감을 갖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가뜩이나 '수저 계급론'에 좌절한 국민의 박탈감이 심각한 상황이다. '반재벌 정서'가 더 악화하기 전에 재벌가 전반이 행동거지를 돌아보고 자성하기 바란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2015/12/29 15:23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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