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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휴머니스트회 활동과 김태길 교수님을 회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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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회 활동과 김태길 교수님을 회고하며 스크랩

2011.01.20.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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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회 활동과 김태길 교수님을 회고하며

 

 

신영무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대학생활 때 나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학생활동 중의 하나가 ‘한국휴머니스트학생회’다. 나는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3년 3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였다. 신입생 환영회 등으로 들떠 지내던 어느 날, 법대 오윤덕 선배와 이경호 선배(당시 법대 3학년)를 만나게 되었고, 두 분의 친절한 안내와 설득에 매료되어 한국휴머니스트학생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한국휴머니스트회’(이하 ‘정회’)는 1958년 조직된 ‘상우회’라는 휴머니즘 연구 동아리가 모체다. 4․19 혁명 직후, 당시 교수 데모에 참가했던 고(故) 최재희, 김태길(이상 서울대 철학과), 이상은(고려대 철학과), 손우성(성균관대 불문학과) 교수 등 ‘지성 29인 모임’이 주축이 되어 인간의 존엄성 회복과 사회개혁을 목적으로 1960년 공식 발족하였다. 한국휴머니스트학생회는 바로 이 정회의 산하 조직으로 1963년 탄생하였다. 당시 서울대 대학원에서 과학철학을 연구하면서 정회의 간사로 활동하시던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님께서 의욕적으로 학생회 조직의 창립에 도움을 주신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 휴머니스트 학생회는 이경호, 오윤덕, 홍석제(이상 서울대 법대), 박대영(서울대 문리대), 김광욱, 김유채(서울대 공대)와 장환일(서울대 의대), 조중근(동국대), 이의송, 정명덕(고려대), 차재능, 홍준식(이상 중앙대), 오용근, 임동철, 오성창(이상 성균관대) 등과 이화여대, 숙명여대 등 서울시 소재 명문 대학 재학생 중 휴머니즘 사상 연구에 뜻이 있는 학생들이 주축을 이루어 조직됐다. 초대 회장은 이경호 선배가 맡았다. 창립모임이 있고 몇 달 뒤, 나는 이규홍(전 대법관), 송인준(전 헌법재판관), 김선옥(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 이건영(전 건설교통부 차관), 김삼훈(전 UN 대사), 이상지(개인사업), 김수용(서강대 경제학과 교수)과 함께 학생회에 참여하였다. 한두 해 뒤 김경한(전 법무부 장관) 선배와 조명재(전 LG생활건강 사장), 이근태(법무법인 세종 사무국장), 이흥재(서울대 법대 교수), 김영훈(변호사), 고행일(인제의대 교수), 정재호(전 공정거래위원회 국장) 등이 동참하였고, 또 뒤이어 문리대 철학과에서 이한구(성균관대 교수), 안경률(국회의원), 오거돈(전 해양수산부 장관), 배인준(동아일보 주필) 등도 합류했다. 서울대 외에도 이화여대에서 임순규(오용근 회우 부인), 이경희(중앙대 교수), 김지련(김태길 교수 장녀), 숙명여대의 신경자(재미, 사업), 이금화(서예가), 노숙령(전 중앙대 교수) 등 타 대학 학생들도 모임에 가입해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 소재 대학 외에 지방대학 등 다른 대학으로도 참여가 확대되면서 학생회 인원은 백 명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모임의 활동 역시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우리는 참으로 학생회 활동에 열심이었다. 주말이면 모여서 토론회, 독서회 등으로, 방학 때면 농촌 봉사활동 등으로 휴머니즘 연구와 실천에 앞장섰다. 나 역시 학생회 활동에 열정을 갖고 참여했다. 심지어 사법시험 준비에 몰두하느라 모든 동아리 활동과 개인 모임을 자제했던 대학 졸업반 시절에도 학생회 모임만은 가능하면 빠지지 않고 나가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김태길 교수님은 평소 말씀이 없으셨다. 운동을 좋아하시어 교정에서 테니스 치는 모습을 자주 뵐 수 있었다. 마른 체구, 긴 다리, 훤칠한 키에 흰 유니폼을 입고 계시던 모습은 마치 한 마리 ‘학(鶴)’을 연상케 했다. 언젠가 정초에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김 교수님의 명륜동 자택으로 세배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전통 한옥집에서 사모님과 따님들이 정성껏 다과를 베풀어주셨는데 충청도 양반집 문화 같은 것을 느끼게 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교수님께서 결혼하실 때, 당신의 기준에 맞는 배우자를 찾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했던 여러 에피소드를 어느 책에서 솔직하게 고백하신 이야기가 떠오른다. 교수님은 배우자 선택뿐 아니라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적극성과 무서운 추진력을 갖추셨다.

대학 졸업 무렵부터 고시 준비나 취업 준비, 병역 의무 등으로 우리 회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던 중, 1968년에 서로 연락이 이어져서 ‘한국휴머니스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나는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청년회 시절에는 휴머니즘의 이념에 관한 연구보다는 회원들 간의 친목 도모에 더 치중하였고, 자연스럽게 교수님들과의 소통도 전과 같지 못하게 되었다. 직장생활 등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면서, 다시 청년회 모임에서 매월 학계, 언론계, 예술계 등 명망가들을 초청하여 휴머니즘 공부를 하였는데, 교수님의 강의는 쉽게 생활 속의 진리를 깨닫게 하고 우리 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등에 대한 지도의 말씀을 해주시어 인기가 높았다. 1988년 청년회 창립 20주년 때도, 2005년 정회 창립 45주년 때도 오셔서 특강을 해주셨다. 1994년, 그간 정회 회원들이 연로하고, 많은 회원들이 작고함으로 인하여 정회의 활동이 휴면 상태에 빠지고 청년 회원들도 50대에 이르자 청년 회원들이 정회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때 우리들은 교수님을 상임고문으로 가까이 모시게 되었고, 교수님께서 직접 써주신 회보의 제호 글씨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 교수님을 더 자주 뵙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어쩌다 점심 한번 모시는 정도로 지내고 말았다. 재작년 봄, 강남의 한 일식당에서 조중근, 조명재 회원과 함께 교수님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할 때의 일이다. 조중근 회원이 “선생님, 가훈(家訓)이 있으십니까?”라고 묻자, “특별한 게 없고, ‘웃으며 살자’ 정도가 될 것 같으네요.”라고 답하시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께서, 더욱이 윤리학 대가 댁의 가훈이 ‘웃으며 살자’라니 놀랄 수밖에. 곧, 우리는 그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되고 더욱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이날 오찬이 선생님과 마지막 식사 모임이 될 줄이야 짐작이나 했겠는가.

교수님은 인격과 성품, 학식, 모든 면에서 뛰어난 고매한 학자셨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예리하게 사물을 분석하는 통찰을 제공하는 데 탁월하셨다. 80대 중반이 넘어서까지도 끊임없는 저술 활동을 통해 좋은 글을 남겨주셨고, 오늘날 지식인들이 갖추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바른길을 제시해 주셨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삶이란 무엇이고, 보람 있는 인생이란 어떠한 것인지 등 삶의 근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시간이 흐르면서 휴머니스트회가 출범 당시의 취지를 잃고 자칫 친목 모임으로만 흐르게 될 것을 걱정하시어 21세기 지성인들의 사명에 대해 힘주어 이야기하시던 교수님의 강연은 회원들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렇다고 교수님이 근엄한 학자의 모습만 갖추셨던 것도 아니다. 교수님은 가끔 농담도 하셨고, 매우 인간적인 소박한 면모도 보이시곤 했다. 2004년 학술원장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모임에서, 80대 중반이신 교수님의 테니스 파트너가 던진 농담에 사모님 이하 참석자들이 박장대소했던 일이 생각난다. “요즈음 교수님은 테니스에 대한 열정이 식어가는 듯하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을 파트너로 동반할 때에는 어느 때보다 더 열정적으로 뛰신다.”

최근 타계하신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의 생활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셨지만, 교수님이야말로 그에 못지않은 무소유의 생활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큰 가정을 이끄시는 가장으로서 사모님의 노후생활을 위한 일정 분을 제외하고 전 재산을 ‘심경문화재단’ 설립을 위해 출연하신 게 대표적 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수준을 한층 높이기 위해 철학계 원로들과 함께 ‘성숙한 사회 가꾸기 모임’의 창립을 주도하시고, 여유롭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활동비의 상당 부분을 혼자서 감당하시기도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어쩌다 점심식사 한 끼 대접하는 것으로 그쳤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좀 더 계셔서 우리 사회가 성숙해지고 선진화되는 데 기여해 주셨어야 했는데 참으로 아쉽다. 특히 올가을, 한국휴머니스트회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서도 교수님의 말씀을 들을 기회를 준비하던 참이었는데 참으로 애석하다. 김태길 교수님, 부디 영면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