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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한바오로 2세 “모든 길은 로마 교황으로 통한다” 가톨릭교회, 다국적기업처럼 통치해

긴 긴 시간 2013. 4. 25. 19:46

요한바오로 2세 “모든 길은 로마 교황으로 통한다”

 

폴란드식 가톨릭교회, 절대군주제를 갖춘 다국적기업처럼 통치해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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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3.04 09: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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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월 28일 공식적으로 교황직에서 물러남으로써, 가톨릭교회는 ‘명예 교황’ 체제에 돌입했다. 베네딕토 교황은 새 교황이 뽑힐 때까지는 로마 카스텔 간돌포의 여름 별장에서 지내고 있으며, 새 교황이 선출되면 바티칸 내 수도원에 거주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바티칸에서는 콘클라베를 위한 추기경단 소집공고를 내고 새 교황 선출을 준비하고 있다. 누가 새 교황으로 선출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누가 선출되든지 30년 넘게 바티칸을 장악했던 ‘절대군주제로서의 교회모델’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권력분산 원칙으로 되돌아가 교회 민주개혁의 물꼬를 터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베네딕토 교황이 계승했던 ‘교황중심주의’는 근본적으로 선임 교황이자 그의 신학적 동반자였던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복고적 차원에서 만든 틀이다.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 역시 요한바오로 2세 교황에게서 찾아야 한다.

 

요한바오로 2세 교황, 공의회에서도 ‘하느님 백성인 교회’ 반대 입장

▲ 요한바오로 2세 교황 (사진출처/한국어 브래태니커 사전)
요한바오로 2세 교황에 대한 평가는 교회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성인 교황’이라는 평가와 ‘교황독재를 부활시켰다’는 평가가 엇갈린다. 적어도 인품으로 본다면,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선임이던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이 재임 당시 그에게 존경을 표했던 것처럼 나무랄 데가 없이 다정하고 세심한 배려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교회구조와 시스템의 차원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어놓은 다원주의를 징계하고, 지역교회의 권한을 회수하고, ‘로마중심주의’를 강화시킨 ‘문제의 인물’이었다.

 

1979년 1월 첫 해외순방지로 멕시코를 선택해 푸에블라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 참석한 교황은 기꺼이 군중과 노래하고 손뼉 치고 춤추며 열정적으로 인권을 옹호했다. 그래서 교회 안의 진보적 인사들은 그를 ‘투사’로 추앙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황은 사제와 수녀들에게 정치에 개입하지 말고 주교에게 순명하라는 보수주의자의 인상을 남겼다. 이는 강력한 인권옹호자인 교황과 교회 안의 인권을 부정하는 교황이 어떻게 한 인격 안에서 가능한지 묻게 한다.

훗날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된 폴란드 크라코프 교구의 카롤 보이티야(karol Wojtyla) 대주교.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한 프랑스의 신학자 도미니크 체누가 밝혔듯이, 보이티야 대주교는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을 담당한 공의회 위원회에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데 처음부터 반대했다. 그가 마음속으로 그린 교회는 백성의 평등한 공동체가 아니라, 평신도가 사제와 주교의 지도로 삶의 진리를 찾아가는 위계적 구조의 ‘완전한 사회’였다. 가톨릭신자들이 개인의 구원을 추구함으로써 굶주림과 폭력 등 사회적 정치적 불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인간해방’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폴란드의 절대주의 교회가 박해 속에서 폴란드 문화 지켜내

요한바오로 2세, 민주주의 경험 부재..일사분란 권위체제에 희망 걸어

 

보이티야 대주교가 품었던 ‘절대군주제로서의 교회 모델’은 폴란드의 경험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폴란드 민족주의는 폴란드의 통치자 미에츠코가 보헤미아의 공주와 결혼한 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10세기부터 로마 가톨릭과 동일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폴란드는 1024년 교황이 인가하면서 주권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가톨릭은 국가 통일성의 상징이었다.

 

폴란드는 지난 세기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세력다툼 속에서 격변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계몽주의와 시민혁명과 근대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채 주요 강대국들의 분할점령을 당해야 했다. 보이티야가 태어난 1920년에 폴란드는 러시아인들을 바르샤바에서 몰아내고 공화국을 건설했지만, 1939년 다시 히틀러의 침공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약 600만 명의 폴란드인이 죽임을 당했고 250만 명이 독일로 끌려가 강제노동에 시달렸으며, 310만 명에 달했던 유대인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10만 명뿐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폴란드는 파시즘 대신에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았다. 이 와중에 폴란드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가톨릭교회는 전쟁 중 파괴된 수백 개의 성당을 재건하고, 목숨을 잃은 2,000명의 사제를 대신할 지원자를 찾았다. 그중 한 사람이 카롤 보이티야였다.

 

보이티야는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4년 후 형제를 잃었으며, 개인적 비극과 끔찍한 전쟁 속에서 채석장과 화학공장 노동자로 일했지만, 열정을 잃지 않고 게토에서 유대인들을 탈출시키는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칠레의 사제들이 피노체트 독재정권 아래서 칠레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된 것처럼 폴란드 사제들은 폴란드 민족주의와 민중의 열망이 담긴 폴란드 문화의 보호자였다. 가톨릭교회의 순례와 기도 등 종교행사들은 저항의 한 형식이었으며, 교회는 이민족과 파시즘, 공산주의의 박해에서 노동자와 지식인들을 보호하는 방패막이였다.

 

폴란드 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추기경과 주교들을 중심으로 단일한 지배체제를 구축한 ‘절대주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교회 밖의 군사독재에 대응해 교회 안의 민주화를 추진하고 민중교회를 세운 라틴아메리카의 교회와 다르게, 폴란드 교회는 신자들에게 절대적 충성을 요구했고, 또 그러한 충성을 받았다. 1983년 교황이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경찰은 교황의 숙소 밖에 있던 군중을 해산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군중은 한 사제가 떠나라고 명령하자 몇 분 내로 흩어졌다. 이처럼 폴란드 교회는 전쟁 전에 존재하던 ‘완전한 사회’로서의 교회를 대표했다.

 

이 폴란드 교회가 보이티야의 열정적 헌신과 전통신학 수호, 절대 권력과 절대적 순명의 신념을 만들었다. 연민의 정이 많았던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이처럼 제국주의와 이민족에 의해 고통받는 다른 민족들의 아픔을 이해했다. 그러나 현대세계의 민주주의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세속주의가 침식한 현대사회에서 민주적 교회는 자살행위로 보였다. 폴란드 교회처럼 하나의 일치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교회가 자신이 소유했다고 믿는 진리를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2천 년 전 콘스탄티누스가 기획한 제국교회처럼 단일한 신앙에 의해 통일된 유럽 그리스도교 왕국을 원했다.

 

보이티야 대주교, 매우 영성적인.. 오푸스데이 지지자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물질적 소유에 관심이 없고, 매우 영성적이며, 아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다. 또한 지칠 줄 모르고 교회에 봉사하며 때로는 생명을 무릅쓰고 가톨릭교회에 적대적인 나라를 방문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성인이 될 만하다. 그러나 교황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없었던 폴란드 교회라는 환경의 산물이었다. 그는 미사를 모국어로 드리는 것과 같은 전례상의 변화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교회 민주화는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한 보이티야 대주교(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어떤 입장을 표명했는지 13년 후에 치러진 콘클라베에서 기억하는 주교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보이티야 대주교가 사목경험이 많고 혈기방장한 58세였다는 점만 생각하고 그를 교황으로 뽑았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2년 오푸스데이의 창설자인 호세 마리아 에스크리바 몬시뇰을 시복했으며, 2002년 시성식을 거행했다. (사진출처/http://www.josemariaescriva.info/ 갈무리)


 

 

보이티야 대주교가 요한바오로 1세의 장례미사에 참석하러 로마에 갔을 때 오푸스데이(Opus Dei) 창립자인 호세 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구에르 몬시뇰의 무덤을 방문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오푸스데이는 프랑코 총통 시대에 스페인에서 세력을 확장한 우익 가톨릭단체다. 보이티야는 코라코프 대주교 시절에도 유럽에 있는 오푸스데이 센터에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었고, 오푸스데이는 그런 모임에서 보이티야가 행한 연설문을 모아 책으로 출간했다.

 

당시 오푸스데이는 비밀주의적 성격과 음모론, 우익적 성격 때문에 유럽의 많은 주교 사이에 혐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전임 교황들은 오푸스데이와 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요한바오로 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오푸스데이를 전 세계적인 면속구로 승격시켰으며, 수도회의 지위를 부여했다. 한국교회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은 오푸스데이의 서울대교구 진출을 거부했으며, 정진석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이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대교구에 진출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 보프 “로마가 지배계급처럼 행동한다”


“교회보다는 세속권력에 도전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지역교회의 권한을 축소하려고 움직이자, 가장 먼저 “로마가 지배계급처럼 행동한다”며 포문을 연 것은 브라질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였다. 보프는 <교회: 카리스마와 권력>(1984년)에서 가톨릭교회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 내 인권’이라고 주장했다. 보프는 “교회는 인격의 무한한 존엄성을 인정하며 그렇기 때문에 인권에 관해 세계의 양심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그러나 선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가 실천을 통해 증거를 보여주고, 자기 교회 현실 안에서 인권을 존중하고 촉진하는 최초의 집단이 될 때만 사람들은 교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만 보는 교회를 당연히 비판하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교회 안의 인권유린을 입증이라도 하듯, 라칭거 추기경이 이끌던 바티칸 신앙교리성은 보프 신부를 재판에 회부해 일 년간 침묵을 지키도록 선고했다. 이를 두고 페니 러녹스는 <로마교황청과 국제정치>(한국신학연구소, 1996)에서 “가톨릭의 장래에 첫 번째로 중요한 문제는 교회 내의 인권”이라고 말했다. 로마에 있던 한 미국수녀는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사회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너무 바빠서 교회 내 인권이 다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교회보다는 세속권력에 도전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또한 그들은 사회와 그 구조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와 종교적 권리들 사이의 연관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러녹스는 교회 내 인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황에 의해 새로 임명된 주교들이 라틴아메리카의 기초공동체를 파괴하고, 해방신학을 단죄하고, 가난한 이들과 여성들에 대한 수도자들의 투신을 가로막고, 마침내 교회의 사목지침을 변경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요한바오로 2세 교황 자신은 폴란드 정치에 깊이 개입하면서도 제3세계의 다른 성직자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언제나 극력 비난했다. 이를테면 필리핀의 제이미 신 추기경이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를 축출한 야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교황은 신 추기경을 홀대했으며, 필리핀 주재 교황대사 브루노 토르피글리아니 대주교는 신 추기경을 비난하며 마르코스 일가를 지지했다. 필리핀 평화혁명이 성공하자 신 추기경은 교황의 비공개 비판을 받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다.

 

비오 10세 교황처럼 ‘검열주의’를 다시 불러온 요한바오로 2세

 

요한바오로 2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설계자였던 요한 23세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지만 비오 10세 교황은 높이 평가했다. 비오 10세는 스스로 쾌활하고 서민적인 교황이라고 여겼으나 시대에 뒤진 관례를 고수한 매우 편협한 지도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비오 10세 교황은 금서목록을 작성했으며, 출판인과 편집자 및 많은 저자들을 파문했다. 여러 개의 신학교를 조사해 폐쇄했으며, 계몽주의를 비롯해 현대적 사고나 과학에 대한 종교적 고찰은 ‘모든 이단들의 종합’이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모든 성직자와 신학교 교사들은 현대주의에 반대한다는 서약을 해야만 했다. 이 서약이 폐지된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때였다.

 

▲ 비오 10세 교황 (사진출처/한국어 위키백과)
비오 10세는 자신이 내린 명령을 확실히 수행하기 위해 교회 안에 세계적인 첩보단체인 소달리티움 피아니움(Sodalitium Pianium)을 창설했다. 소달리티움은 1921년 이 단체의 우두머리인 움베르토 베니그니 몬시뇰이 무솔리니의 첩자가 되면서 해체되었다. 소달리티움이 블랙리스트에 올린 인물 가운데는 장차 요한 23세 교황이 된 론칼리 추기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검열주의는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종교재판소와 검사성성의 후신인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라칭거를 임명함으로써 일부 다시 재현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학자였던 한스 큉, 스힐레벡스, 발라수리야, 보프, 혼 소브리노, 매튜 폭스 등의 신학적 성과가 단죄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한국교회에서도 최근 각 교구마다 ‘출판검열위원회’가 새롭게 만들어지면서 이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처럼 요한바오로 2세 교황 역시 비오 10세의 ‘현대주의’에 대한 두려움을 나누어 갖고 있다.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어 “정직한 무지가 경솔한 지식보다 낫다”고 말했다. 또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염려가 커진 까닭에 사제와 수도자들은 평신도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종교적 복장을 다시 착용하고, 특히 사제들은 독신생활뿐 아니라 사제복의 상징성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사제직분을 신성시했기 때문에 결혼을 위해 성직을 포기하려는 사제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성직포기는 쉽게 허용되지 않았고 성직을 포기한 사제들이 교회 안에서 새로운 직무를 맡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심지어 본당에서도 그들은 배제대상이 되곤 했다. 교황은 평신도들이 미사 중 성체분배와 같은 사제들의 일을 떠맡는 데 불쾌한 심경을 감추지 않으며, 여성사제 문제는 아예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를 계승한 베네딕토 교황은 여성사제 문제를 다루는 것 자체를 자동파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국교회의 경우에도 최근 들어 ‘장엄한 전례’를 강조하고, 여성에게 미사보를 강요하며, 평신도의 성체분배를 배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국적 기업’이 된 가톨릭교회.. “절대권력은 완전히 타락한다”

 

지난 30여 년 동안 요한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추구한 가톨릭교회의 모델은 ‘절대군주제’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황들은 절대군주의 상징인 칭호와 상징들을 폐기해왔다. 황제를 ‘폐하’, 왕을 ‘전하’라고 부르는 것처럼, 교황을 ‘성하’, 추기경을 ‘예하’, 주교를 ‘각하’라고 부르던 관행은 사라졌다. 급기야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은 삼층관을 거부하고, 대관식마저 폐지하고 ‘교황 즉위미사’로 대체했다. 가톨릭교회는 전임교황들이 정한 관례를 존중하는 까닭에 요한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 역시 이 관례를 따랐다. 그러나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교황이 추구하던 구조적인 교회 민주화 작업이 지난 30년 동안 중단되면서 교황의 권한은 더욱 강화되고, 교황청의 지역교회에 대한 간섭은 더 커졌다.

 

현재 가톨릭교회는 철저한 ‘승자독식’ 체제다. 누가 교황이 되느냐에 따라서 지역교회 수장들의 권한을 축소할 수도 있고,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에 고위공직자를 파견하듯이 교황의 입맛에 맞는 주교들이 지역교회를 장악할 수 있다.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구조다. 하늘에 하느님이 계시듯, 지상에서는 교황이 전권을 가진다. 그 결과 지역교회에서 욕심이 있는 성직자라면, 교구민보다 먼저 교황청의 눈치를 살핀다.

 

가톨릭교회의 모든 신학적-이데올로기적, 사목적-전술적 결정을 내리는 수뇌부가 교황과 교황청이 있는 로마에 집중되면서, 가톨릭교회는 로마에 본사를 둔 다국적기업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이런 교회는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훼손하고, 창조적 신학를 차단하는 압제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액튼 경(Lord Acton)이 “권력은 타락하기 마련이며, 절대권력은 완전히 타락하고 만다”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권력은 비록 그것이 종교적 권력이라 해도 강력한 지배욕을 낳고, 결국 자신을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대체물로 만든다.

 

역사상 엄청난 박해를 경험한 초기 교회는 안정적이고 체계적인 제도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열렬한 신앙’과 순교자들의 용기를 통해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교황청은 가톨릭교회의 통일성과 일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신앙인들의 자유로운 연대’인 신앙공동체의 다양한 견해와 활동을 박해하고 있다. 그것은 ‘권력 없이’ 세상과 인간을 섬겼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을 말소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가톨릭교회 안에 남아있는 ‘제국교회’의 흔적을 지우는 과정이 곧 회벽에 갇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과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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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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