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유아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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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길교회 정기포럼 “한국교회의 현실과 대안적 미래”-①유아기적 한국교회를 말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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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그래서 한국교회를 진단하고 분석하려면 깊이 있게 존재의 문제를 봐야 한다. 중심을 문제 삼지 않고 표면적이고 결과적인 사안들만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접근은 일시적이고 대증적일 뿐이다. 그런 사안들은 존재와 내용을 들여다보고 판단하기 위한 자료로 고려돼야 하지만, 거기 머물러서는 충분하지 않고 괜한 수고로 끝나기 쉽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존재가 어떤가? 어떻기에 문제인가? 그것은 어떤 정신으로부터 비롯되는가? 그런 점들을 중심으로 주제를 풀어나간다. 들어가기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전제한다. 한국교회를 말하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또 쉽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는, 흔히 한국교회를 비판하지만 많은 교회들은 그래도 건강한 편이고 긍정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한국교회”는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아니라 문제가 되고 있는 교회들에 국한된다. 또 하나는, 한국교회는 외형적 규모로나 신학적 성향으로나 사회적 구성으로나 이미 하나의 교회라고 보기 어렵다. 그래서 문제가 단순하지 않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래서 하나의 관점에 다 들어오지 않고, 다른 관점들로도 충분히 설명하거나 분석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어린 아이들”이라고 힐책한 적이 있다(고전3;1-2). 전에는 밥을 못 먹어 젖을 먹였다고 해도, 아직까지 그래야 하는 “어린 아이들”, “육신에 속한 자”라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어린 고린도교회 같이 바로 한국교회도 유아기적이라고 본다.
내가 “어린”을 “유아기적”이라고 바꾼 데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어리기 보다는 어린 상태가 고착되었다는 생각에서이다. 어리거나 늦으면,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면서 좋아지리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한국역사에 이미 삼세기째 뿌리를 내려 성장해온 결과 외형은 성인 같이 커졌지만, 그 정신이나 하는 일은 여전히 미숙하고 어리석어서 미래에 대해 점점 더 의문이 들고 회의적이 된다.
한국교회가 유아기적이라는 것은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목사의 교회 사유화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담임목사에 의한 ‘교회 재산 빼돌리기’ ‘교회 예산 아무렇게나 쓰기’ ‘교회 물려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기’ 같은 것들이 아주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 목사들이 그러는 것이 어리석고 유치하지만, 교인들도 그런 데 대해서 크게 반대하지 않고 동의해주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교인들의 미성숙과 관계된다.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목사가 하는 것은 순종하고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목사를 따라가고 심지어는 옹호하기까지 하는 다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전횡이 거듭된다. 교인들이 교육을 덜 받았거나 무력한 사람들이 아니다. 대학들도 다 나오고,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위치에 있고, 심지어는 교수, 박사, 의사, 변호사, 고위 공직자 등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왜 그럴까? 교회가 유아기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육 정도나 사회적인 지위와 상관없이 어떤 내적 취약성들을 가지고 있다. 멀쩡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하는 것도 그 이유이다.
프로이트는 종교의 출발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써 설명한다. 인간은 두려우면서도 매력적인 유아기의 아버지로부터 보호받고 그에게 의존하기 위해 아버지를 외부에 투사하는데, 투사된 존재가 바로 신이다. 그런 프로이트의 신은 한국 교회의 신앙 형태 속에 나타나는 신과 흡사하다. 교인들은 절대자 하나님에게 의탁하고, 그의 보호 아래서 안심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을 대리하는 ‘목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카리스마 넘치고 주장이 강한 목사의 교회 안에서, 강력한 아버지의 처벌(거세)을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애착관계를 보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교인들에게 재현되고 일상화된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처벌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은 현실(교회)에서 유사한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정상적인 판단을 어렵게 하고 강한 권위에 대해 승복하고 추종하게 만든다. 그렇게 되면,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이냐가 선택의 이유가 된다.
한국교회가 유아기적이라는 점에서 교회의 이기주의나 자기중심성이 쉽게 이해된다. 남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것은 유아기적 특성이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채워지면 다 되는 줄 안다. 다른 관점에서 볼 줄 모르고, 다른 입장이라는 게 없다. 한국교회는 자기 자신을 위한 교회이고, 자기 자신이 목적인 교회이다. 가령 한국교회에는 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주일성수, 십일조와 각종 헌금, 새벽기도, 철야기도, 작정기도, 교회봉사....... 그런 모든 것들이 의무이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다. 교인들은 그런 걸 다 잘 지키면 복을 받고 천국에서도 상을 받으리라는 기쁨과 만족감을 누리기도 하지만, 지키지 못하면 죄의식을 갖게 되고 불편하고 불안해진다.
그런 식으로 교회는 교인들을 예속시킨다. 돈과 시간과 마음을 바치고 헌신하게 한다. 즉 교회를 위해 살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가 유지되고, 확장되고, 강화되고, 부유해지는 것은 그런 구조에서이다. 거기서 한국 교인들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신앙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목사와 교회의 시선을 의식하고, 하라는 것을 다 하면서도 두려워하며 따르는 ‘종’들이다. 또한 그런 상태에서 안정을 구하며 만족하고 심지어 좋아하기까지 하는 ‘어린 종’들이다.
유아기적 교회에서는 교회만이 교회를 위하고 자신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목사들은 목사들대로, 교인들은 또 교인들대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목사들의 교회 사유화 같은 것들이 그렇고, 총회장이나 기관장이 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들도 그렇다. 자기가 높아지려는 것 외에는 체면도 염치도 양심도 없다. 교인들 역시 교회 안에서나 세상 속에서 이기적인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다. 요즘은 많이 줄었지만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전도하거나 찬양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남들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남들의 따가운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다.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유아기적 한국교회에서 교인들이 유약한 것 역시 필연적이다. 한국교회처럼 사람들이 서로의 생활에 깊이 개입하며 간섭하는 경우도 드물다. 사소한 것까지도 알고 있어야 하고, 무슨 일이 있든지 목사에게, 교회에 말하도록 한다. 아프든지, 출장가든지, 어디에 원서를 내든지, 자동차 사고가 났다든지, 아니면 신차를 뽑았다든지....... 다 알려주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섭섭해 한다. 목사가 직접 할 수 없으면, 부목사나 전도사를 통해서, 아니면 교인들 상호간에 멘토, 멘티라는 이름으로 서로 묶어주고 관여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교회 안에 정서적이고 또한 사회적이기도 한 의존체계가 이루어진다. 중보기도도 그렇다. 서로 서로 중보함으로써 개입하고 의존적이 된다. 그런 식이다 보니 교회는 크고 화려한데 교인들은 왜소하고 유치하기 그지없다. 별 거 아닌 사소한 일들 갖고도 울고 웃고, 좋아하고 싫어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관심과 소통이라는 이유로 시시콜콜한 걸 다 알고 있다. 생각도 비슷하고 노는 것도 같이 논다. 교인들끼리는 소통이 잘 되지만 남들과는 소통이 안 된다. 교인들은 교회에 소속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얻지만 주체가 없고, 자신감도 없으며, 어리고 나약할 뿐이다.
그런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교회가 사회에 의해 아주 쉽게 조종당한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채찍도 당근”도 필요 없다. 즉 공권력의 강제나 혜택 없이도, 대중들을 조작하고 조종하는 방식으로써 그렇게 한다. 뉴스에 의해, 드라마에 의해, 광고에 의해, 인터넷에 의해, 신문에 의해 아주 쉽게 유린된다. 체제가 조장하는 것들을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처럼 이행한다. 사회나 세상에 대해서 비판적이거나 최소한 상대화해서 보는 것 마저 기대하기 어렵다. 쉽게 세상에 따라가고, 동화되며, 선망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것을 보면 세상이 하는 걸 그대로 하고 한 술 더 뜨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목사들로부터 신도들에 이르기까지, 연로한 장로들부터 연소한 청년들에까지 세속적이고 자본주의적인 문화와 가치관이 깊이 스며들어가 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세속주의는 바로 그런 점에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술, 담배 안 하는 걸로 신자의 표식으로 삼고 자위하기도 하지만 삶의 중심은 세속에 물들어서, 교인들이 문화의 첨병, 사회의 아바타, 체제의 수호자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가지만 더 하자. 유아기적 교회는 자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교회이다. 언제까지나 자기 문제를 안고 사는 교회이다. 그것을 지배하는 것은 불안이다. 불안하기 때문에 떠나지 못할 뿐더러, 과거로 퇴행한다. 성숙하면 하나님을 집착하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 있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듣고 예배할 수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적 애증관계 속에서 처벌에 대한 두려움, 죄의식으로 인한 집착이 그 상태를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게 한다. 그 구조 속에 고착되는 것이다. 거기서는 그런 자기 자신이 항상 문제이고 과제이다. 자기 밖에 없고, 자기를 떠나지 못한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자기 속에 갇혀 사는 자폐증마저 보이고 있다. 앞에서 말한 이기주의나 자기중심주의와도 관련되지만, 자기에게 묻혀있음으로 바깥세상과는 담을 쌓고 산다.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그것이다. 약자, 빈자, 소수자들의 인권이나 생존조건 개선 등을 위한 참여나 봉사나 희생에 역동적이지 못하다. 믿는 사람들이냐 아니냐, 교인들이냐 아니냐, 그것을 기준으로, 아니라면 상관없는 일로 치부한다. 그저 교회의 확장, 강화, 19세기식인 선교....... 그런 데만 힘을 쓴다. 유치하고 망가진 자신을 확장하고 강화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지에 대해서도 관심 없다. 한국교회는 그런 식으로 현실과는 동떨어져서 자기 세계 속에서 자기들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간다. 분리주의, 현실도피주의, 역사의 유기,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 무기력, 회의주의, 비관주의, 패배주의 등이 다 그 같은 현상이고 문제이다.
3. 유아기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그런 유아기를 어떻게 벗어나서 성숙한 어른이 될 것인가? 결국 한국교회가, 목사들을 포함한 교인들 모두 자유로운 주체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교인들은 과거 유아기적이었던 자기 자신들을 벗어나서 자유롭고 자발적인 주체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한다. 교인들의 그런 존재의 변화, 삶의 중심의 변화가 수많은 한국교회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고 열쇠이다. 그런데 존재의 변화, 중심의 변화라는 게 말은 쉽지만 실제로는 어렵기 그지없고, 심지어는 ‘안 일어나는 일’이기까지 하다. 이를테면 유아기적 사회인이 유아기적 교인이 되지만, 유아기라는 데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 그런데도 방법이 있을까?
사실 교회는 사람들의 중심의 변화, 전적으로 새로워짐을 위해 진흙탕에서 씨름하듯 고투하는 기관이다. 그렇게 해왔던 역사도 깊고, 축적된 유산도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되어야 하는 지도 알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후5;16)”이라고 했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그리스도로서의 하나님,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다. 그 신앙이 사람들을 유아기적인 옛 자아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또 자신 있게 살게 한다. 신앙이 유아기적인 두려움과 집착, 불안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고, 한 주체가 되어 자유롭고 선선하게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며 관계를 맺어나가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으로써 죄라는 이름의 그런 모든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그런 것들을 상대화하고 내려다 볼 수 있는 상태에까지 올라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한국교회처럼 신앙이 강하고, 또 그만큼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가 없는데 왜 그런가? 그것은 신앙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신앙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들의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이기에는 모자라고 부족하다. 거기서 한국교회의 신학, 정신이 문제되는 것이다. 나는 다른 데서 한국교회가 변증법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한국교회, 존재의 문제와 변증법적 신앙”, [한국기독교신학논총], vol. 62),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거룩하고 초월적이고 전능한 하나님과 함께 스스로를 제한하고 낮아져서 참여하고, 사랑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한 하나님을 ‘동시적으로(simul)’ 믿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잘 믿는데,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잘 모른다. 낮고, 천하고, 약하고, 가진 게 없고, 유한한 십자가의 그리스도로서의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해서 스스로 그렇게 되셨고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럼으로써 인간은 심판이나 정죄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서, 다시 말해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어서, 이제 자율적으로 하나님과 관계하며, 다른 사람들과도 관계한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 속한 자로서 세상의 어떤 권력이나 이념이나 가치나 풍조로부터 벗어나서, 그런 것들을 상대적으로 보고 양심에 따라 존중하기도, 비판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신학, 정신을 정립해야 할 과제가 대두된다. 그를 위해 나는 두 가지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한국교회의 신론을 바로 잡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절대적이고, 전능하고, 거룩하며, 의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는 심판주 하나님, 법과 규례를 지키면 복을 주고 못 지키면 벌을 주는 율법적 하나님 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하나님을 말하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절대적 하나님의 범주나 교리적인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절대적이고 전능한 하나님, 초월주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알게 하고 오류를 보게 함으로써, 자기전능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말 그대로 인간(죄인)으로 살게 한다. 그러나 너무 강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은 그만큼 더 심하게 억압하고 불안하게 하며, 오이디푸스적 애증관계에 고착시키고, 신경증이나 정신병까지 일으킬 수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이나 거룩, 전능 같은 것들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말하기 위한 출발이고 배경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를 보게 하고 알게 하고 그에게로 다가가게 하는 통로이다. 율법은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3;24)이라는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된다. 율법의 하나님도 없으면 안 되지만 그리스도로서의 하나님에 초점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은 ‘사랑(요일4;7)’이고, ‘친구(요15;15)’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추고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됨으로써 사람들을 유아기적 공포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래서 그들이 자유로운 주체가 되고, 타자들에 대해서도 두려움이나 경계심 없이 다가가서 관계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해 나가게 되었다. 인간이 그럴만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서, 그의 전적인 사랑과 은혜로써 그렇게 했다. 그래서 ‘복음’이고 그 복음을 믿고 이해한 사람들은 감사함으로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기독교는 복음이 주고 율법이 종인데, 한국교회에서는 주종관계가 바뀌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두려운 아버지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고착관계가 진정한 신인관계, 진정한 신앙을 대체하고 만 것이다.
둘째, 구원론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바울이나 종교개혁의 신학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의 구원론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로주의를 대체했다. 공로주의는 사람을 억압하고 교회에 의존적이 되게 하며, 교회의 노예로까지 만든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런 공로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루터에게서 구원은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는다. 교회가 요구하는 공로를 쌓음으로써 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능동적 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사함을 받고 그의 의를 얻는다(수동적 의). 루터에게서, 그리고 개신교에서 구원은 철저하게 믿음으로써, 즉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써 얻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고 있지 않다. 즉 무엇을 해서나 안 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용납되고 인정됨으로써 얻는 것이다. 인간은 단지 자신을 조건에 관계없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열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뤄지며, 더 나가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데 그것이 또한 구원이다. 그런 믿음을 강조해야, 심판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공로주의적 신앙, 율법주의적 신앙을 내면화한 사람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개신교 일각에서, 믿음을 강조하면 행위를 무시하지 않느냐, 또는 개신교가 믿음을 강조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하게 된 것이라며 행위를 강조해야 한다는 식의 반론이 많다. 본회퍼가 “싸구려 은혜”를 비판하고 “비싼 은혜”를 강조한 것은 히틀러 치하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체제에 순종적이었던 교회가 자기합리화를 위해 그 교리에 숨어들었던 데 대해서이지, 중세종교의 미망에서 교회와 교인들을 해방했던 원래적인 정신과 의미에 대해서가 아니다. 믿음과 믿음을 통한 구원이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믿음은 행위를 부정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 두려워서 하는 행위, 의무로써 하는 행위, 남들을 의식해서 하는 행위, 마지못해서 하는 행위, 보상이 있어야 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으므로 조건 없는 행위, 하고 싶어서 하는 행위,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해서 하는 행위, 그래서 진정한 행위가 되게 한다. 본회퍼가 요구하는 “죄의 고백”, “인격적 고백”, “제자도”, “십자가”, “성육한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등은 모두 믿음으로써 은혜 입은 자의 내적이고 자발적인 순종과 결단이 전제된다. 종교개혁은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의 각종 규례들과 율법들, 요구들을 상대적으로 보게 했고, 죄의식이나 불안으로부터 해방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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