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나만의 photostory 만들기 <전쟁 그 후>

긴 긴 시간 2013. 6. 18. 21:02

나만의 photostory 만들기 전쟁 그 후

 

누군가에게는 아니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기념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현재 진행형의 아픔이다.

 

 

여류소설가 공지영씨는 이번의 남북 간 이산가족상호방문을 보고 중앙일보에 이렇게 썼다. "어머니가 끓여주는 된장국도 못 먹고 어린 시절 놀던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도 못 만져보고 새로 풀먹인 이불 홑청에 누워 불을 끈 채로 두런두런 이야기도 못하는 그런 만남. 더욱이 늙은 어머니가 쓰러진 병원에도 못 가고 돌아가신 부모 산소에 술 한잔 올리지 못하는 이 비인간적이고 이상한 상봉을 우리는 과연 만남이라고 불러도 될까."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왜 그래야 될까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을 할까!?

왜 내 나이만큼의 단절과 왜 내 나이만큼의 정리 안된 가족관계와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지

왜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지 왜 독일하고는 다른 비인간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지

우리사회는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아니면 한 적이 있는 지 묻고 싶다.


 

자유쟁이님의 특별한 포토 미팅

오키

 

야외에 기념 조형물을 촬영하면서 전쟁기념관안의 레스토랑을 향하여 걸어갔다.

 

6·25전쟁 50주년 기념조형물
 
형제의 상
  •  
  • 평화의 시계탑
     
  • 광개토대왕릉비
     
  • 국군전사자명비
     
  • 유엔군전사자명비
     
  • 비상
     
  •  

     

     

     

    우리는 대화를 위해서 쉐자르레스토랑으로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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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기념관이란 팻말이 아직두 아픈거 같다.

    전쟁이 끝났지만 나에겐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 상처

    보통 일상적인 호칭 "아빠"

    이 단어가 남녀 사이에도 또 부녀 사이에도 쓰이고 있는 데

    한번도 불러보지도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일이 없을 거라는 상실감

    마치 지금은 매우 슬픈 듯이 쓰고 있지만

    사실 별로 슬픈지도 모르고 어린시절은 지나갔다.

    초등학교에서 공개 호구조사 할때도 별 생각이 없었다.

    학기초면 어김없이 공개적으로 아버지가 없는 아이는 손들라고 했었다.

    나는 아무 저항감없이 손을 들었다. 특별한 느낌두 없이

    지금 생각해 보니 한반에 한 서너명 정도

    정원이 60명이면 한 5%정도 였던 거 갔다.

     

    참고자료

       밑의 자료에 의하면 전체 피해인원에서 약 15%의 민간인 납치/행불자가 있다.

       

      6.25 전쟁 당시 한국군 및 UN 군 피해상황 (단위 : 명)

     

    구분

    사망/전사

    부상

    실종/포로

     

     

    776,360

    178,569

    555,022

    42,769

     

     

    한 국 군

    621,479

    137,899

    450,742

    32,838

     

     

    U N 군

    154,881

    40,670

    104,280

    9,931

     

     

     

            

      6.25 전쟁 당시 남측, 북측 민간인 피해상황 (단위 : 명)

     

    합 계

    남 한 민 간 인

    북한민간인
    (추측)

     

     

    사망/학살

    부상

    납치/행불

     

     

    2,490,968

    990,968

    373,599

    229,625

    387,744

    1,500,000

     

     

    이 상황에 대한 파악과 이 상황에 처한 가족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과연 언제 부터 시작 됬는 지 알고 싶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봉을 보면서 무얼 느꼈을까!?

     

    다음은 일부 인용한 글이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독일인들은 분단시절에도 동서독간에 일정한 절차만 밟으면 서로 내왕할 수 있었다. 월남인들은 남북 간에 치열한 전쟁을 치르면서도 관혼상제 등 인륜대사 때는 남북 간에 서로 왕래할 수 있었다. 중국과 대만간에는 지난 87년 이후 친척간의 내왕의 길이 트여 작년만 해도 총 185만 건의 왕래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의 눈물바다를 이룬 우리들의 상봉광경을 본 외국인들은 도대체 그 동안에 무엇을 했기에 이런 일이 왜 5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일어나느냐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은 우리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이지만 아직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거 같다.

    또한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고

    다음은 우리나라라는 틀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이 있어서 참고로 올린다.

     

    한국전쟁을 바라본 또하나의 시각

     

    윌리엄 스톡의 저서중

    이 책에서 지은이가 강조하는 것은 한국전쟁이 한국만의 전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후 10년 안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던 또 다른 세계대전을 방지하는 데 한국전쟁이 절대적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지은이는 한국전쟁을 한반도에서 벌어진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전쟁의 기원부터 국제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국제전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툭은 미소를 비롯해 전쟁에 관련된 많은 국가들의 방대한 자료를 동원해 연구했다. 특히, 한국전쟁 기간 동안 유엔과 세계 각국이 한국전쟁과 관련해 어떤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는지 정확하고도 자세한 분석을 수행하고 있다.

    이 책은 종래 한국전쟁을 남북한, 그리고 미·중·소 3대 강국의 역학관계에서만 보아오던 제한적인 관점에서 해방시켜서, 그야말로 글로벌하게 전세계의 무대 위에 올려 놓았다. 즉, 유엔 참전국 16개국, 나토동맹, 동유럽과 발칸 국가, 아랍-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제3세계, 인도와 스칸디나비아를 포하는 중립국들. 이 수많은 나라들이 냉전 시대의 불안 속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한국전쟁에 대응하는 치열한 몸부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지은이는 한국전쟁에서 유엔의 역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것은 유엔이라는 국제기구가 단순히 강대국의 정치적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강대국 외교에 많은 제어를 가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분석을 통해 지은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한국전은 모순과 실책과 비극이 뒤엉켰던 전쟁이었으며, 냉전시대에 동서 양진영의 군사 대립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강대국으로 하여금 그들의 한계를 인식하게 하고, 지구인들에게 더 이상 허락할 수 없는 열전에 대한 두려움을 예견케 함으로써 냉전시대의 '장기 평화'를 가져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전쟁기념관을 뒤로 이태원을 탐방하러 출발

     

    자유쟁이님 덕분에 서울 살면서 가보지 않고 또 유래두 몰랐던 곳을 알게 되었다.

     

    다음은 여러 자료를 포스팅 한것 입니다.

     

    淸軍→일본군→미군 차례로 주둔

    이태원은 우리 역사에서 오랜 기간 '이방인의 땅'으로 인식돼 왔다.

    '이태원'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효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여러 학설이 있다.

    우선 효종 때 동네에 배밭이 많았다는 이유로 배나무 이(梨)가 붙은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이곳에 귀화해 살았다는 의미로 '이타인(異他人)'이 어원이라 보는 접근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왜란 중에 성폭행을 당한 여성과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모여 살던 동네여서 다를 이(異), 태반 태(胎)자를 써서 이태원(異胎圓)으로 불렸다는 일부 학계의 주장도 있다.

    어원마다 차이는 있지만, 이태원은 이방인 공동체 지역의 성격이 강한 곳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조선시대부터 용산 일대는 군사 관련 시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군용지로 이용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가 이곳에 머문 이후 군사지역으로서 정체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부대는 1882∼1984년 이태원에 주둔했고, 이후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1910∼1945년, 광복 이후엔 미군이 이곳을 차지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태원 상권은 사실상 미군이 주도했다.

    1970년대 미군기지에서 나온 물품들로 상권이 형성된 이태원은 이후 미군을 위한 유흥가로 거듭나 기지촌과 미국식 클럽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1957년 미군의 외박과 외출이 허용되면서 기지촌까지 생겼다.

     

    여하튼 이태원은 우리 민족의 아킬레스건 같은 곳이다.

     

    1960년대 말까지 미군대상 매춘업소가 남산3호터널 입구부터 이태원 입구까지 해방촌과 삼각지 파출소 뒷골목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정부는 이태원 미군기지 중심으로 서빙고동, 한남동, 동부 이촌동 일대에 외국인 전용주택과 아파트 는 물론 고급 외국인 주택단지까지 건설했다.

    그러자 1960년대 이후 한국에 들어온 각국의 대사관이 이태원 지역에 대거 입주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고급주택단지가 조성됐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쇼핑지구가 형성돼 88올림픽 당시 이태원 상가 점포는 1천800개에 이를 정도로 쇼핑의 중심지로 주목받기도 했다.

    올림픽 기간에는 하루 평균 6천명의 외국인이 이태원에서 약 3억 달러를 사용했다는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논문도 있다.

    이태원은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인의 유입이 늘면서 현재는 판잣집과 대저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경관을 연출한다.

    남산 기슭의 하얏트호텔과 이태원동, 한남동 일대에는 외국공관을 중심으로 부유한 외국인이, 이태원로 남쪽의 이태원동과 보광동 일대에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들어온 외국인과 국내 저소득층 주민이 주로 분포해 있다.

    1997년 서울 최초의 외국인 관광특구로 지정돼 외국인 관광객도 즐겨 찾는 곳이 됐다.

    그러나 이태원 상권은 88올림픽 이후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점차 줄고 서울시의 퇴폐업소 단속 강화, 1990년대초 `범죄와의 전쟁' 등으로 눈에 띄게 위축됐다.

    여기에 강남이나 신촌, 홍대입구 등 새로운 유흥지역이 등장하고 1980년대 이후 미군 사병이 이태원 외출을 삼가는 분위기마저 형성돼 불황을 겪었다.

    이태원은 이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건너온 외국인이 서서히 새로운 상권과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다.

     

     

    우리는 요런 상점이 있는 거리를 지나서 해방촌으로.......

     


     



    시대의 아픔 안은 '해방촌'…'예술마을'로 재조명
    용산구, 일상과 예술 조화 환경개선 사업 완료, 해방촌 이야기 들려주는 108계단…30개의 벽화

     


     

     

     

    용산구(구청장 성장현)는 해방촌의 역사적 배경에 디자인을 더해 이 일대 환경개선사업을 완료하고, 일상과 예술이 하나 되는 ‘예술 마을’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로써 내ㆍ외국인이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함은 물론 이태원 상권과 연계된 새로운 관광명소로도 자리매김한다.

    이번 사업은 지난해 4월 행정안전부로부터 국고보조금 1억원을 지원받아 진행되는 사업으로, 구 자체기금인 옥외광고정비기금 5000만원을 더해 5월부터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했다. ‘예술마을로 거듭나는 해방촌’이라는 주제아래 낙후된 생활환경을 계단 그래픽, 담장 벽화 등으로 탈바꿈시켜 활력과 매력이 넘치는 예술마을로 조성하는 것. 또 해방촌 골목마다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고 다듬어 문화, 역사 등의 자원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찾아오는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보물찾기 마을을 만든다는 게 기본 계획이다.

    도시디자인과 관계자는 “단순한 벽화사업이 아닌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동네를 풍요롭게 하는데 이바지하고자 지역 활동가와 함께하는 주민 참여형 사업으로 추진했다”며 “해방촌만의 특색 있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용산2가동의 명물인 108계단, 남산 소월길 등 A부터 H까지 8개 존을 통해 해방촌의 소중한 이야기를 담았고 30개의 벽화와 조형물 같은 장치로 숨겨지고 몰라본 우리 동네의 보물을 찾아내 예술로 표현했다.

    성장현 구청장은 “시대적 상처를 지닌 해방촌은 외국인들의 많은 이주로 인해 ‘상전벽해’라고 느낄 만큼 많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곳”이라며 “이번 사업을 통해 내ㆍ외국인 함께 호흡하며 일상과 예술이 하나 되는 마을로 자리매김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문기사  발췌 내용

     해방촌 일대의 지역적 특성을 살린 개발로 서울시의 환경을 개선하는 계획

     

     

    남산과 용산민족공원을 잇는 '남산 그린웨이'가 지난 18일 발표되면서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유턴 프로젝트'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용산은 뚝섬과 더불어 유턴프로젝트의 핵심. 녹지축 조성 및 결합개발방식을 계기로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남산 자락 개발이 탄력을 받으면서 유턴 프로젝트가 제 모양을 갖춰가고 있다. 이제 관심은 후광효과가 기대되는 용산 녹지축 주변지역으로 쏠리고 있다.

    ◆제 모습 갖춰가는 유턴프로젝트=서울시는 지난 2006년 2월 유턴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용산민족공원, 뚝섬 서울숲, 한강 주변을 수준높은 중대형 주택지역으로 개발해 강남으로 몰렸던 주택 수요를 강북으로 유턴시키고 이를 은평과 미아?도봉까지 확대해 강북을 유(U)자 형태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미 용산역 일대, 보광동(한남뉴타운), 서빙고 지역 등은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번에 남산~한강 그린웨이 조성 및 해방촌(용산동2가)~후암동 결합개발 사업으로 인해 낙후된 저밀지역인 해방촌, 후암동, 갈월동, 이태원동 지역에도 개발열기가 뜨거워질 전망이다.

    ◆녹지축 주변지역의 개발방향은=녹지축을 중심으로 녹지에 편입되지 않은 지역, 녹지축 주변지역인 후암동, 해방촌, 이태원동에 뜨거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해방촌은 용산구의 대표적 달동네. 1970년대에 지어져 오래된 다가구주택과 단독주택이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빼곡히 자리잡고 있다. 이번에 녹지로 개발되지 않는 나머지 지역에는 친환경 고급주택단지가 조성될 것이란 소문이 끊이지 않고있다.

    해방촌은 남산 남쪽의 구릉지대로 한국의 베벌리힐스를 가늠케 할 수 있는 입지여건을 가지고 있다. 최고의 주택단지로 언젠가는 개발될 것이라는 심리가 만만치 않다.

    후암동은 서울역, 남산, 용산민족공원 예정지(미8군 캠프코이너)를 접하는 요충지다. 이번에 고밀도로 개발되는 지역은 서후암동이다. 서후암동은 33㎡ 빌라 기준으로 3.3㎡당 5000만원대인 반면 동후암동은 3300만~3500만원 수준. 동후암동은 급매로 3.3㎡당 3000만원 초반까지 매물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동후암동도 배후주거단지로 손색이 없다. 시티파크 등 한강로 지역의 랜드마크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북향이나 동향인 반면, 이 지역은 정남향, 동남향으로 주택배열이 가능하다.

    이태원 2동은 남산고도제한을 받아 5층 이상 건물이 없고 저층형 빌라와 다세대주택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른자위땅인 중앙경리단 이전여부가 변수다. 재건축 연한을 훌쩍 넘어선 주택들이 많아 재개발 얘기가 솔솔 나오고 있다.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면 남산고도제한을 적용받는다 하더라도 건너편 용산한신아파트 정도의 높이(8층/96세대)는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개발방식은=서울시는 이 지역을 인근 역세권을 함께 개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적당한 역세권이 나타난다면 두 구역을 하나로 묶는 '결합개발' 방식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겠다는 방침이다.

    해방촌의 경우 구릉지 경사면을 최대한 활용해 5층 이하의 고급 테라스주택을 짓는 것이 유력하다. 만약 시 차원의 개발이 여의치않으면 지주 자력개발 방식도 권장하겠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도시관리과 관계자는 "용산민족공원, 남산 주변이 노후한 가옥으로 남겨질 때 명품공원, 남산복원의 가치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면서 "다양한 개발방식을 마련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숙제하느라 발췌한 내용입니다.

    앞으로 다시 탐방할 때 참고하면 좋을 듯해서요.

    숙제란 부담스럽지만 공부가 많이 됩니다.

    자유쟁이님 걷기 공지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자유쟁이님 사랑해요.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제 스마트 폰과 pc의 상호 연관 프로그램 활용을 못하는 바람에

    여러자료를 더 찾게 되어서 공부는 더 되었네요.

    출처 : 산들산들 산들걷기
    글쓴이 : 길따라가다(원영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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