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자녀들 눈 한번 맞추지 못하고 살다가 정신 차려보니 오갈 데 없어진 아버지들에게 ‘수고하셨다’며 말 건넬 수 없을까? 서로를 괴물로 보지 않는 것, 그래서 다음 세대를 위해 언젠가 만날 수 있을 지점을 열어두는 것, 이것이 새로운 정치의 시작일 것이다.대통령 탄핵 건은 이제 법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삼 개월 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주인공들은 대통령의 개인적인 친구가 국정에 개입해서 국가 기강을 마구 뒤흔들고 있다는 정황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국정을 현 대통령에게 맡길 수 없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했고 국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국회는 그 바통을 헌법재판소와 특검으로 넘겼다. 나는 바통을 받은 법조계가 이 일을 ‘전문성’을 가지고 잘 해내리라 믿는다. 대한민국이 파행적 근대화의 터널을 벗어날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저력을 축적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마무리되면 ‘헬조선’이 될 뻔한 대한민국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보장되는 ‘나라다운 나라’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영국 브렉시트 국민투표나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 등으로 의기소침한 21세기 지구촌 시민들에게도 냉소주의가 아닌 희망을 갖자는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계에서는 대통령에게 지나친 권력이 부여되는 정치제도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대의제의 한계를 절감한 시민들 사이에는 지속적 정치 참여로 직접민주주의의 역량을 키워가는 움직임이 일고 있음은 고무적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퇴진 기각’ 집회에 나가는 좀 다른 국민들을 만난다. 군인 가족을 소집하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나갔거나 전쟁의 공포를 모르는 ‘철없는 세대’를 위해 노구를 끌고 나간 분들도 있다. 촛불은 정권을 잡기 위한 음모이며 ‘저들’이 정권을 잡으면 이어질 숙청 순번 리스트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나돌고 있다고 한다.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촛불이냐 태극기냐’면서 편이 갈리고 있다. 가끔 단체 메일을 보내는 미국 교포인 동문은 범죄가 증명되지도 않았는데 대통령을 죄인 취급하는 행태에 대해 분노하면서 “여기가 북조선이란 말인가”, “자랑스러운 여성 대통령을 못 만들어내는 우리들이 한심하다”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40여년 전 한국을 떠난 그에게 한국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내게 촛불집회에 모이는 국민들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국민들인데, 내 교포 지인에게는 매우 낯선 존재일 것이다. 암울한 식민지 치하와 6·25, 그리고 절대 빈곤과 공포의 기억을 원체험으로 안고 있는 구세대 국민과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의 토양 아래 각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한 신세대 국민 간의 거리를 좁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탄핵 정국에 불편함을 토로하는 여성 국민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대통령이 여자여서, 독신이어서 어떻다는 식의 설명이나 성형과 시술에 대한 끝없는 추측과 조롱 어린 표현이 거북하다고 했다. ‘세월호 일곱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시원하게 말해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쏟아지는 온갖 의혹들, 그리고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걸러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박근혜 하야송 ‘bad year’(배드 이어)를 듣고 모욕감을 느낀다는 한 여성은 대통령 개인의 존엄성도 지켜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월호와 대통령 탄핵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겠다는 동네 아주머니를 무지한 국민이라고 생각해버리면 되는 걸까? “박근혜 대통령보다 깨끗한 정치인 있으면 나와 보라”, “캐도 캐도… 보톡스 태반주사밖에 안 나오는 이런 훌륭한 대통령”이라는 자막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고개를 끄떡이는 할머니에게 구조적 차원을 왜 못 보냐고 말해야 할까?사람은 자기 경험의 장을 넘어서서 사고하기 힘들다. 더구나 한국 사회는 초고속 압축적 변화를 거친 사회가 아닌가? 전 국민이 한순간에 구조와 역사에 대한 인식을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자녀들 눈 한번 맞추지 못하고 살다가 정신 차려보니 오갈 데 없어진 아버지들에게 ‘수고하셨다’며 말 건넬 수 없을까? 아버지가 힘들면 아버지의 친구부터 만나도 좋을 것이다. 원한과 복수, 증오와 적대, 무시와 모욕의 정치가 재생산되지 않도록 환대의 문법을 익히고 차이에 민감해질 때이다. 서로를 괴물로 보지 않는 것, 그래서 다음 세대를 위해 언젠가 만날 수 있을 지점을 열어두는 것, 이것이 새로운 정치의 시작일 것이다. 개인성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국민들이 주도하는 미완의 민주 시민혁명이 배제와 편가름의 정치를 넘어서 마침내 완성되기를!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자녀들 눈 한번 맞추지 못하고 살다가 정신 차려보니 오갈 데 없어진 아버지들에게 ‘수고하셨다’며 말 건넬 수 없을까? 서로를 괴물로 보지 않는 것, 그래서 다음 세대를 위해 언젠가 만날 수 있을 지점을 열어두는 것, 이것이 새로운 정치의 시작일 것이다.대통령 탄핵 건은 이제 법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삼 개월 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주인공들은 대통령의 개인적인 친구가 국정에 개입해서 국가 기강을 마구 뒤흔들고 있다는 정황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국정을 현 대통령에게 맡길 수 없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했고 국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국회는 그 바통을 헌법재판소와 특검으로 넘겼다. 나는 바통을 받은 법조계가 이 일을 ‘전문성’을 가지고 잘 해내리라 믿는다. 대한민국이 파행적 근대화의 터널을 벗어날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저력을 축적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마무리되면 ‘헬조선’이 될 뻔한 대한민국은 절차적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보장되는 ‘나라다운 나라’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영국 브렉시트 국민투표나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 등으로 의기소침한 21세기 지구촌 시민들에게도 냉소주의가 아닌 희망을 갖자는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계에서는 대통령에게 지나친 권력이 부여되는 정치제도를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대의제의 한계를 절감한 시민들 사이에는 지속적 정치 참여로 직접민주주의의 역량을 키워가는 움직임이 일고 있음은 고무적이다. 나는 이 시점에서 ‘퇴진 기각’ 집회에 나가는 좀 다른 국민들을 만난다. 군인 가족을 소집하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나갔거나 전쟁의 공포를 모르는 ‘철없는 세대’를 위해 노구를 끌고 나간 분들도 있다. 촛불은 정권을 잡기 위한 음모이며 ‘저들’이 정권을 잡으면 이어질 숙청 순번 리스트도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나돌고 있다고 한다.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촛불이냐 태극기냐’면서 편이 갈리고 있다. 가끔 단체 메일을 보내는 미국 교포인 동문은 범죄가 증명되지도 않았는데 대통령을 죄인 취급하는 행태에 대해 분노하면서 “여기가 북조선이란 말인가”, “자랑스러운 여성 대통령을 못 만들어내는 우리들이 한심하다”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40여년 전 한국을 떠난 그에게 한국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내게 촛불집회에 모이는 국민들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국민들인데, 내 교포 지인에게는 매우 낯선 존재일 것이다. 암울한 식민지 치하와 6·25, 그리고 절대 빈곤과 공포의 기억을 원체험으로 안고 있는 구세대 국민과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의 토양 아래 각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한 신세대 국민 간의 거리를 좁히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탄핵 정국에 불편함을 토로하는 여성 국민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대통령이 여자여서, 독신이어서 어떻다는 식의 설명이나 성형과 시술에 대한 끝없는 추측과 조롱 어린 표현이 거북하다고 했다. ‘세월호 일곱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 시원하게 말해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쏟아지는 온갖 의혹들, 그리고 술자리에서나 할 법한 걸러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박근혜 하야송 ‘bad year’(배드 이어)를 듣고 모욕감을 느낀다는 한 여성은 대통령 개인의 존엄성도 지켜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세월호와 대통령 탄핵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겠다는 동네 아주머니를 무지한 국민이라고 생각해버리면 되는 걸까? “박근혜 대통령보다 깨끗한 정치인 있으면 나와 보라”, “캐도 캐도… 보톡스 태반주사밖에 안 나오는 이런 훌륭한 대통령”이라는 자막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고개를 끄떡이는 할머니에게 구조적 차원을 왜 못 보냐고 말해야 할까?사람은 자기 경험의 장을 넘어서서 사고하기 힘들다. 더구나 한국 사회는 초고속 압축적 변화를 거친 사회가 아닌가? 전 국민이 한순간에 구조와 역사에 대한 인식을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자녀들 눈 한번 맞추지 못하고 살다가 정신 차려보니 오갈 데 없어진 아버지들에게 ‘수고하셨다’며 말 건넬 수 없을까? 아버지가 힘들면 아버지의 친구부터 만나도 좋을 것이다. 원한과 복수, 증오와 적대, 무시와 모욕의 정치가 재생산되지 않도록 환대의 문법을 익히고 차이에 민감해질 때이다. 서로를 괴물로 보지 않는 것, 그래서 다음 세대를 위해 언젠가 만날 수 있을 지점을 열어두는 것, 이것이 새로운 정치의 시작일 것이다. 개인성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국민들이 주도하는 미완의 민주 시민혁명이 배제와 편가름의 정치를 넘어서 마침내 완성되기를!